[한국야구사 재발견](9) ‘야구와 축구응원가’가 최초로 함께 실린 『신식창가집』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20.01.16 10: 20

1895년 갑오경장 이후 은둔의 나라 조선 땅에는 바다 바깥 먼 나라의 문물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 근대체육도 그 시기부터 학원을 중심으로 점차 다른 나라들의 운동을 접하기 시작, 한국체육사의 여명기가 열렸다.
“신교육령에 의한 학교가 설립되는 동시에 학과에 있어서 체조를 교과목으로 과(課)하게 됨에 따라 각 학교가 운동회 같은 행사를 갖게 되었으며 각종 운동경기가 점차 보급되었다. 1896년 5월 2일 외국어 학교 분교인 영어학교 교사 및 학생들이 동소문 밖 삼선평(三仙坪)으로 화류회(花柳會)를 가졌다. 이 화류회란 그 당시에 있어서 운동회를 겸한 것이었다. 이 회류회가 동교(同校) 영국인 교사 허치슨 씨 지도하에 거행된 것이 우리나라 체육운동 혁검기(革劍期)의 발디딤이 되었고 학교운동회의 효시가 되었다.”(이광린, 1964년 ‘구한말의 관립외국어학교에 대하여’, 1964년 『향토 서울』 제20호)
1896년 5월 2일은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가 열린 날이다. 『독립신문』 1896년 5월 5일 치 (이하 현행 맞춤법 표기로 바꿈) 기사를 살펴보면, “영어학교 교사와 학도들이 이달 이튿날 동소문 밖으로 화류를 갔다니 오래 학교 속에서 공부하다가 좋은 일기에 경치 좋은 데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고 장부에 운동을 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한 일이니 다만 마음과 지각만 배양할 게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몸 배양하는 것도 매우 소중한 일이니 몸 배양하는 데는 맑은 공기에 운동하는 게 제일이요 목욕을 자주 해야 몸을 정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실려 있다.

이달 이튿날이란, 바로 5월 2일을 이르는 것이다. 그날 영어학교의 영국인 교사 허치슨(Hutchison)의 주도로 삼선평 일대(오늘날 서울 성북구 삼선교 부근)에서 학도들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몸 단련에 나선 것이 한국근대체육의 발아(發芽)였다는 게 정설이다. (나현성, 1958년 『한국운동경기사』)
축구와 야구는 날로 기력을 잃고 쇠잔해 가는 조선왕조의 끄트머리에 밖에서 들어온 대표적인 운동경기였다. 구한말의 선각자들은 국운을 일으키려면 백성들의 체력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여러 경기를 적극 장려, 계몽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야구와 축구가 조선 땅에 발을 내디딘 기원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린다. 다만 조선인들끼리 최초로 경기를 한 것은 야구, 축구 모두 1906년께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야구는 그해 2월에 황성기독청년회와 덕어(德語=독일어)학교가, 축구는 6월에 역시 황성기독청년회와 대한체육구락부가 서로 경기를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어찌 됐든 축구와 야구는 한국 근· 현대 스포츠사에서 기차 철로처럼 양대 축을 형성하고 서로 경쟁하면서 인기종목으로 자라났다.
축구와 야구 경기를 하는 데에서 응원의 노래가 울려 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언제부터 응원가가 불리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일제강점 초기에 음악책 구실을 했던 여러 종류의 『창가집(唱歌集)』을 통해 그 흐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최근에 확인된 『신식창가집(新式唱歌集)』에는 야구가(野球歌)와 축구가(蹴球歌)가 나란히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야구가와 축구가가 한꺼번에 등장하는 『창가집』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아마도 이 책이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1921년에 초판이 나온 이 노래책의 제목은 『대증보음풍영월 신식창가집(大增補吟風詠月 新式唱歌集)』이다. 근대서지학회 오영식 회장이 제공해준 텍스트는 7판본(1922년)이다.
『신식창가집』의 저작 겸 발행자인 김재덕(金在悳)은 신명서림 주인으로 최장군전(崔將軍戰), 춘원(春怨) 같은 신소설 발행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세로 14.5, 가로 9.5cm 크기의 이 책은 182쪽이고, 표지는 유실돼 옛 소장자로 보이는 김만송(金晩松) 명의로 『신식창가집(新式唱歌集)』 제목을 달고 개장돼 있다. 이 『신식창가집』에는 장한몽별가조, 장한몽가, 대동강선유가, 미인자탄가, 망국가 등의 창가(唱歌)와 더불어 야구가와 축구가 외에 운동가(運動歌)도 들어 있다.
그 가운데 야구가는 그 이전에 알려져 있던 야구가와는 그 가사가 다르다. 이 책 157쪽에 실린 야구가와 163쪽에 실린 축구가의 원문 가사는 다음과 같다.(표기는 현행 맞춤법으로)
야구가 가사(○○은 팀의 명칭을 넣어 부름)
(1)활발용감(活潑勇敢) 강견(强堅)한 ○○ 야구수(野球手)
쳬육덕육(體育德育) 지육(智育)을 수양(修養)하고서
협동일치(協同一致) 정신(精神)을 고취(鼓吹)한 후(後)에
결승전(决勝戰)인 이 마당에 나왔다네
(후렴)플레이플레이 ○○ 야구수(野球手)
백승(플레이 또는 ○○이 독점(獨占)
(2)무쇠 같은 팔뚝으로 배트를 휘두르니
열구(熱球)는 히트되어 사중(沙中)에 춤추네
그라운드 나와있는 우리 선수(選手)야
전선(全鮮)의 베이스볼계(界) 정복(征服)하여라
축구가 가사
(1)엄파이어 빗긴 손 들어 부를제
마음대로 발빠르게 민첩(敏捷)하게 모은다
예있다 제있다 가지가지 연신(連信)하여
기묘(奇妙)한 연락(連絡)으로 이리저리 제낀다
(2)비호(飛虎)와 같이 나는 듯이 차는 자
누구냐 용감(勇敢)하다 하프 풀백이로다
용감(勇敢) 하프 풀백 한번 발로 퉁 차니
퉁- 하고 반공중(半空中)에 높이 솟아 비상천(飛上天)
악보가 없는 이 창가집에 수록된 야구가와 축구가는 3절까지 수록돼 있고, 야구가는 후렴도 포함돼 있다. 『신식창가집』에 있는 야구가와 축구가, 운동가는 1928년에 출판된 『이십세기신청년수양창가집(二十世紀新靑年修養唱歌集)』에도 똑같은 가사로 된 창가가 들어 있다.
여태껏 확인된 한국 최초의 야구노래(혹은 응원가)는 야구단운동가(野毬團運動歌)이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1909년 7월 22일 치 기사에서 모두 5절로 된 야구단운동가를 소개하고 있다. 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1909년 7월 24일 치에 소년남자가(少年男子歌)를 게재했는데, 노래 가사는 야구단운동가와 똑같다.
『황성신문』은 “유학생야구단이 금일 하오 4시에 운동을 행하는데 少年男子(소년남자)라 하는 運動歌(운동가)를 사용하니 그 뜻의 활발함이 영인감촉(令人感觸)이기 좌(左)에 특재(特載)하노라.”는 기사와 더불어 노래 가사를 실었다.
일본(도쿄)유학생야구단이 팀을 구성, 모국을 방문한 것은 1909년이 처음으로 그해 7월 21일 황성기독청년회(YMCA)와 첫 경기를 치러 유학생팀이 19-9로 크게 이겼다. 『황성신문』의 야구단운동가는 그때 불렸던 노래로 가사에 야구와 관련된 특정한 용어가 없어 일반적인 운동가(응원가)로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야구단운동가 이후 1916년에 난파(蘭坡) 홍영후(洪永厚.1898~1941)가 작곡, 『통속창가집(通俗唱歌集)』에 실은 야구전(野球戰)이 실질적인 야구응원가로는 최초의 것으로 보인다. 이상준(李尙俊)이 1918년에 펴낸 『최신창가집(最新唱歌集)』에 들어 있는 야구가는 홍난파의 야구전에 이어 나온 것이다.
야구가는 ‘이상준 본’과 이번에 새로 확인된 ‘김재덕 본’ 두 갈래로 흐름을 타고 전파됐다. ‘이상준 본’은 이상준의 『최신창가집(最新唱歌集)』(1918년)과 『최신중등창가집(最新中等唱歌集附樂理)』(1922년)을 지나 『이십세기신청년수양창가집(二十世紀新靑年修養唱歌集)』(1928년, 永昌書館 발행)을 경유, 약간의 표기 변형을 거쳐 필사본인 『창가장(唱歌帳)』(1933년)에 재록됐다.
‘김재덕 본’은 김재덕의 『신식창가집(新式唱歌集)』과 발행 연대 미상의 『신식유행 이팔청춘창가집(新式流行 二八靑春唱歌集)』(京城 時潮社 發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신식유행 이팔청춘창가집』의 발행 연대를 알 수 없어 『신식창가집』에 채록 된 야구가가 두 창가집 가운데 어느 쪽에 먼저 실린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축구가의 경우는 ‘김재덕 본’에 실린 것이 『이십세기신청년수양창가집(二十世紀新靑年修養唱歌集)』(편저자 姜義永, 永昌書館, 1928년)을 거쳐 『창가장』에도 들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글.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 제공=근대서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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