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사 재발견] (11) 윤동주 시인의 고향, 용정(龍井)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야구를 했다

[한국야구사 재발견] (11) 윤동주 시인의...


간도(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일대)는 우리네 조상들이 일제의 핍박을 피해 정든 고향을 떠나 황무지를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일군 곳이다. 간도는 오늘날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인 용정(龍井), 연길(延吉)을 통칭한다. 숱한 독립투사들이 민족해방을 위해 피땀을 흘린 곳이기도 하다.

용정시 근교에는 가곡 ‘선구자’로 잘 알려진 정자 일송정이 있으며, 시인 윤동주의 생가와 묘소, 독립유공자로 윤동주의 친구인 송몽규와 현석칠 묘소, 용정에서 3.1 운동 때 시위 참가했다가 봉천 군벌의 무차별 발포로 순국한 17명의 의사가 안장된 ‘3.13 반일 의사릉’ 등이 있다.

간도는 여태껏 한국 야구사의 사각지대였다. 우선 사료의 태부족으로 그곳에서 한민족(조선인)이 야구를 했다는 증거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932년 일제가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운 이후 간도로 이주한 일본인들이 야구를 비롯한 여러 체육 활동을 활발히 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간도 지역에서 발행된 『간도신보(間島新報)』에 실린 체육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야구가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25년부터 1937년 사이) 『간도신보』에 게재된 체육 관련 기사의 양과 건수 가운데 야구가 차지한 비율이 가장 많은 17.36%를 차지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연변대학교 체육학원 김경춘, 김영웅의 논문 「일제강점기 간도 체육 및 스포츠 변천 과정-간도신보의 기사분석을 중심으로」 참조)

그런 만큼 조선인들도 당연히 야구를 했으리라는 짐작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일례로 우리나라의 본격 야구 만화인 『황금의 팔』을 지었던 만화가 박기정 선생(1934-2022)이 만주 땅에서 살 때 야구를 한 적이 있다는 생전 구술 증언으로도 그런 정황을 알 수 있다.


최근 간도 용정에 있던 조선인학교 학생들이 야구를 한 사실이 발견됐다. 경매업체인 코베이 ‘삶의 흔적 경매전’에 나온 책 가운데 대성(大成)중학교 제15회 졸업 앨범(1939년)에 야구부 선수들의 단체 사진과 마스크를 쓰고 미트를 대고 있는 포수, 타격자세를 취하고 있는 타자의 모습이 실려 있는 것이 확인됐다.

대성중학교는 특히 윤동주 시인의 시비(‘서시(序詩)’가 새겨져 있음)와 흉상이 설치된 학교로, 간도 용정에 자리 잡고 있다. 코베이 측은 “윤동주 시인은 은진중학교 출신이지만 학교의 통폐합, 간도 민족학교들의 총합적인 의미에서 대성중학교 출신으로 통용된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성중학교 교장은 박재하(朴載廈)로 반일투쟁을 전개한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돼 투옥됐던 인물이다.


앨범의 내용 중에는 만주국의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의 입영 사진, 용정의 지명이 유래된 ‘용두레 우물’에 세웠던 ‘용정지명기원지정천(龍井地名起源之井泉)’ 비석 사진도 보인다.

용두레 우물은 원래 만주족들이 사용했으나 1879년부터 1880년대 사이에 조선 청년 장인석· 박인언이 다시 발견해 우물가에다 ‘용두레’를 세웠고 그 후 1934년 용정촌에 살던 주민 이기섭의 주도로 우물을 수선하고 약 2m 높이의 비석 1기를 세워 ‘용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고 새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 비석은 문화대혁명 때 파괴됐으나 1986년 용정현 인민 정부에서 우물을 새로 파고 비석을 세웠다. 따라서 대성중학교에 실린 사진이 애초에 세웠던 비석인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중학교 졸업 앨범은 32x24cm 크기로 1938년 12월 22일 편집, 1939년 발행(발행 날짜는 비어 있음)이다. 고급스러운 장정 형태로 특히 당시 용정 지역의 풍물, 시대 상황을 알 수 있는 여러 장의 사진이 실려 있다.

용정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야구를 했다는 사실은 출판사 ‘민속원’ 홍종화 사장이 제공한 또 다른 앨범에 실린 야구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용정 동흥중학교 졸업 앨범에는 모두 4장(배트와 글러브를 든 선수들 단체 사진과 공을 던지는 시늉을 하고있는 투수와 공을 잡는 자세의 선수 사진)이 들어있다. 동흥중학교는 1921년,간도 용정에 설립된 조선 민족계 사립학교로 천도교 계통이다.

1919년 3월 손병희가 조선 민족 대표자 33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이 발표된 뒤, 용정 일대에서 천도교 세력이 점차 확장됐고, 1921년 4월 15일 연변 지역에서 반일운동에 나섰던 천도교 신자 최익룡 등이 천도교 조직의 지원 아래, 천도교종리원(天道敎宗理院)의 명의로 용정에 동흥소학교를 설립하고 동흥소학 내에 중학 강습반을 병설했고, 같은 해 10월 1일 중학강습반을 동흥중학으로 승격한 것으로 전해진다.

동흥중학교 졸업 앨범은 1938년 11월 16일 편집, 1938년 12월 발행으로 돼 있다. 대성중학교 졸업 앨범보다 한 달 남짓 앞섰으나 거의 비슷한 시기로 볼 수 있다.

대성중학은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장준하 같은 한국 근·현대사의 유명 인물들을 배출한 학교로, 1946년 은진, 광명, 명신여자, 영신, 대성학교, 동흥중학을 통폐합했고, 현재는 조선족학교인 룡정중학교 내에 있다.

글. 홍윤표 OSEN 고문

사진. (위) 대성중학 앨범은 코베이, (아래) 동흥중학 앨범은 출판사 민속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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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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