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 권5에 나오는 말이다. “나중에 출발하여 제압한다(後發制人·후발제인)”라는 방책의 묘미를 에둘러 표현했다. “남보다 뒤처졌을 때는 상대가 쇠퇴하기를 기다리는 법”(『백전기법(百戰奇法)』 「후전(後戰)」)이라는 설파와 맥을 같이한다. “먼저 출발하여 제압한다(先發制人·선발제인)”라는 책략과 상대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손흥민은 EPL 득점왕 2연패의 대야망을 불태우며 2022-2023시즌을 맞았다. 초반 꾀했던 모략은 선발제인이었다. 기선을 제압하고 그 기세로 대를 쪼개듯 내달리려 함에서 취한 방략이었다.
그런데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상대 수비수들의 집중 견제로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불운까지 겹쳤다. “골!”이라는 탄성이 터지는 순간, 자책골 또는 오프사이드 판정이 잇달았다. 골 포스트와 크로스바를 맞히는 슈팅까지, 외면하는 ‘골운’에 시름이 깊어질 듯했다.그러나 손흥민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언제든지 골을 터뜨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충만한 채 매 경기 온 힘을 다했다. 아울러 방책의 전환을 꾀했다. 자신이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는 양 내비침으로써 상대의 자만을 끌어낸 뒤 그 방심의 허를 찌르는 절묘한 한 수를 던졌다. 준비된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하는 장계취계(將計就計)의 방략, 곧 후발제인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영혼의 단짝’과 함께 밟아 가는 합작 골 50고지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
지난 17일(이하 현지 일자) 7라운드 레스터 시티전(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에서, 이번 시즌 처음으로 벤치에서 경기를 맞이한 손흥민이 터뜨린 해트트릭은 여러모로 되돌아볼 만치 뜻깊었다. 후반 14분 교체 투입된 뒤 불과 13분 사이에 세 골(28·39·41분)을 작렬했기에 더욱 그렇다.
먼저 토트넘 구단 역사상 첫 교체 투입 해트트릭이었다. 1882년 출범한 토트넘이 140년의 오랜 연륜을 쌓는 동안, 지금까지 교체돼 들어가 3골 이상을 뽑은 ‘작은 이적’은 단 한 차례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EPL 사상 일곱 번밖에 나오지 않은 진기한 기록이기도 하다.
2015-2016시즌 EPL 무대에 오른 손흥민은 제8막인 이번 시즌 레스터 시티까지 239경기를 소화하며 96골(47어시스트)을 터뜨렸다. 8시즌째를 소화하며 3골 이상을 뽑아낸 적은 이번까지 세 차례다. 첫 번째는 2020-2021시즌 사우샘프턴전이었고, 두 번째는 2021-2022시즌 애스턴 빌라전이었다.
무엇보다도 ‘영원한 단짝’ 해리 케인(29)과 합작품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레스터 시티전에서, 손-케인 듀오는 합작품 재양산의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 경기에서, 손의 두 번째 왼발 감아차기 슈팅 골은 케인의 패스를 받아 이뤄졌다. 이번 시즌 처음으로 힘을 합친 작품이었다.
손-케인 짝꿍은 ‘찰떡궁합’의 힘을 마음껏 분출하며 EPL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고 있다. 듀오가 밟아 가는 합작 골(Goal Combinations) 기록은 이제까지 그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길이다. 2015-2016시즌부터 호흡을 맞춰 온 둘은 그 다음 시즌(2016-2017) 첫 작품을 낸 이래로 불꽃 같은 기염을 뿜어 왔다. 그리고 이번 시즌 비로소 일곱 경기 만에 스타트를 끊었다. 둘의 합작품은 이제 레스터 시티전까지 42로 늘어났다(표 참조).
손-케인 단짝은 기념비적 금자탑을 세울 꿈을 부풀린다. 합작 골 50고지 등정의 열망을 불태운다. 장밋빛 희망이다. 침묵하던 손흥민이 놀라운 잠재력의 산물인 해트트릭을 분출하면서 EPL 기록사(史의) 눈부신 한쪽을 장식할 채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새 지평이 열릴 그 날이 기다려진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