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표의 휘뚜루 마뚜루] ‘비행기 낙하(落下)’ 시구를 아십니까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22.04.01 09: 59

야구 경기에서 시구(始球)식은 관중의 흥미를 돋우는, ‘약방의 감초’ 같은 구실을 한다. 1982년에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 중요한 경기 때마다 여러 구단 들이 연예인을 동원하거나 의미 있는 인물이 시구자로 나서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같은 시구식은 ‘공을 던지는 자와 치는 자(始打-실제로 치는 게 아니라 치는 시늉만 하는 것)’로 임무가 나뉜다.
여태껏 전해져 내려오는 한국야구 초창기 시구 사진은 1920년 11월 4일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선생이 조선체육회 창립기념으로 열렸던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도포를 입고 시구를 한 것이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것이었다. 그 이후 1928년 5월 18일 윤치호 조선체육회장이 역시 도포 차림으로 시구하는 모습이 『한국야구사』(1999년. 한국야구위원회, 대한야구협회 공동 발행)에 실려 있다.
그 후 보성고 오영식 국어교사가 2005년에 발굴, 공개한 1917년도 ‘보성고 졸업앨범’에 당시 보성고 최린 교장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시구하는 사진이 실려 있는 것이 확인됐다. 그 사진이 현재까지는 한국야구 시구 사진으로는 가장 오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프로야구 최초 시구는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구장에서 열렸던 삼성 라이온즈와 MBC 청룡의 개막전에서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했다. 1983년 판 『한국프로야구 연감』에는 맨 앞부분에 전두환의 시구 장면 사진을 싣고 ‘역사창조의 순간’이라는 제목 아래 “1982년 3월 27일 하오 2시 24분. 서울운동장 야구장. 한국스포츠사에 새 장을 펼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 시구는 한국 스포츠에 프로시대 개막을 알리는 예광탄이기도 했다”고 흥분된 어조로 설명을 붙여놓았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가장 기발하고도 참신한 시구식은 백상(百想) 장기영(1903-1981) 한국일보사 창업주의 발상으로 이루어진 ‘비행기 낙하 시구’일 것이다. 편의상 ‘비행기 낙하 시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엄밀하게는 비행기에서 그라운드 안으로 떨어뜨린 공으로 시구를 한 것이다.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어떻게 공을 정확하게 야구장 안으로 떨어뜨렸는지는 자세한 기사(기록)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6‧ 25 동족상잔 전쟁 직후 혼란기인 1954년, 한국일보사는 대한야구협회와 공동으로 육군과 공군의 야구경기를 주최했다. 그 개막전에서 한국야구 사상 전무후무한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공’으로 시구를 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그 시구식은 『태양신문』을 인수, 그해 6월 9일부터『한국일보』로 새롭게 출발했던 장기영 사장이 창간 신문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고안, 기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육· 공군 야구전’의 ‘비행기 낙하 시구’는 1954년 7월 18일 오전 10시 서울운동장에서 실현됐다. 이 대회 개막전은 7월 17일로 예정돼 있었으나 비로 인해 하루 연기돼 치러졌다.
“당일에는 경기에 앞서 장엄한 입장식이 거행되었는데(……) 야협(野協) 회장 이홍적(李鴻積)씨의 개회사에 이어 공군 최(崔) 참모총장의 축사가 있었고 본사 사장 장기영(張基榮)씨로부터 육·공군 양군 주장에게 화환이 증정된 후 공중으로부터 비행기에서 투하(投下)된 뽈을 가지고 공군 최 참모총장의 시구(始球)로써 공군으로 선공으로 경기는 개전 되었는데(……) (『한국일보』1954년 7월 20일 치 기사-시구를 한 최 참모총장은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했던 최용덕(崔用德)을 일컬음)
이 시구식과 관련, 『한국일보 40년사』(1994년 6월 9일 발행)와『한국일보 50년사』(2004년 7월 14일)를 살펴보면, “(태양신문을 인수한) 한국일보가 창간 후 벌인 첫 스포츠 행사는 대한야구협회와 공동 주최한 ‘육․ 공군 야구전’(1954년 7월 18일)이었다. 서울운동장에서 펼쳐진 육․ 공군 야구전은 비행기가 공중에서 떨어뜨린 공으로 손원일(孫元一) 국방장관이 시구(始球)했다.”고 기술돼 있다.
『한국일보』1954년 7월 18일 치에 실린 대회 예고 기사도 ‘육․ 공군 야구전, 17일 개막, 시구 “뽈”은 비행기에서 투하’라는 제목 아래 “당일에는 경기에 앞서 역사적인 입장식이 성대하게 거행될 것이며 식후에는 공중에서 비행기가 떨어뜨린 ‘뽈’을 경기에 사용하기로 되었으며 손(孫) 국방장관의 시구로 경기를 개시”한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는 이 경기가 비로 하루 늦춰지는 바람에 시구자가 손원일 국방장관에서 최용덕 공군참모총장으로 바뀐 것이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비행기에서 떨어뜨린 공’으로 시구한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 그 비행기의 기종도 알 수 없다. 그저 『한국일보 40년사』에는 “비행기가 공중에서 떨어뜨린 공”으로, 『한국일보 50년사』에는 “경비행기가 공중에서 떨어뜨린 공”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한국일보사는 1961년에 항공부를 신설, 그야말로 공중 기동취재력도 갖추었는데, 당시 도입된 기종은 경비행기인 L-16이었다. 따라서 최초 비행기 낙하 시구 때는 아직 항공부가 생기기 이전이었으므로 경비행기(기종불명)를 빌려서 행사를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비행기 낙하 시구’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시도된 시구식이었다. 기상천외한 시구였지만 장기영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 4월 9일과 10일, 일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큐 브레이브스 팀이 서울로 와 두 차례 맞대결했다. 그 대회 개막전에서 바로 ‘비행기 낙하 시구’를 한 적이 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매일신보』에서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매일신보』1938년 4월 10일치(토요일) 2면 3단 크기의 입장식 광경 사진 밑에 ‘處女球를 投下 大野球戰 豪華開幕 訓練院頭에 今日 龍虎相搏’ 대회 개막 기사에 “오랫만에 야구호화판을 구경코저 손을 꼽아 기다리든 반도의 팬은 오전부터 회장으로 모혀드러 정각 전에는 입추의 여지가 업스리 만큼 만장의 성황을 이룬 가운데 정각이 되자 량군의 선수는 씩씩하게 렬을 지어 입장 대회장 어수세(御手洗) 경일부사장의 개회사로 전원은 이러서서 국가를 봉창하고 그다음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에서 보내는 꼿다발은 우리 연극계의 총아 한은진(韓銀珍) 양이 증정하고 신(愼)비행사 조종의 축하비행이 잇서 대회장 상공을 저공원무(低空圓舞) 하야 처녀구(處女球)와 꼿다발을 떨어트려서 이날 장거(壯擧)로 하여금 한층더 찬란하게 하엿다. 그리고 이 찰난한 경긔의 전모는 필림에 칩어너허 二三일내에 부내 각상설관에서 상연하기로 되엿다”고 보도했다.
한은진(1918~2003)은 한국영화계의 대모로 60여 년을 현역으로 활동했던 명배우였고,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신(愼)은 신용욱(1901~1960)으로 안창남과 더불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을 대표하는 비행사였다.
장기영이 일제 강점기 때의 ‘비행기 낙하 시구’를 본떠 이 같은 시구식을 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비행기 낙하 시구는 상식의 파괴, 혹은 전복이다. 그 유쾌한 발상법이 놀랍다.
글. 홍윤표 OSEN 고문
사진.(위로부터) 1917년 보성고 졸업앨범 수록 최린 시구 모습, 김봉연 시구장면(2009년 7월 25일 올스타전), 1961년 한국일보사가 도입한 경비행기 L-16機, 매일신보 기사(1938년 4월 10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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