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40년 비화]②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 “제7 구단, 가입금 30억 때문에 동아건설에서 한화로 넘어가”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21.02.05 12: 24

1982년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개막, 한국프로야구 역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KBO 리그 사상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을까. 관점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1986년 10월 22일 대구에서 열렸던 한국시리즈 3차전 직후에 벌어진 ‘해태선수단 버스 방화사건’을 꼽는 이들이 많다.
그 사건은, 지역연고제로 출발한 한국프로야구가 맞닥뜨린 ‘지역감정’의 민낯이었다. 그때가 자칫 프로야구 초창기 존립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 수 있는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잘 알려진 사건이므로 굳이 인과관계를 따지거나 당시 상황을 부연할 필요는 없겠다. ‘대구 경기 무용론’ 따위의 강경한 주위의견을 억누르고 슬기롭게 사건을 수습하고 해결에 앞장섰던 이가 바로 이용일(90) 초대 KBO 사무총장이었다.
이용일 초대 사무총장은 한국프로야구 발족(1981년 12월 11일) 이후 9년 동안 사무총장을 맡아 제7, 8 구단 창단,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 성사, 중계권료 도입 등 프로야구 발전에 굵직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국프로야구 창립계획’을 입안, 이른바 전두환 정권 실세들의 협조를 얻어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일이다. 그는 그야말로 한국프로야구 ‘산파’ 노릇을 해낸 산증인이다.

올해 1월 중순께에 만난 이용일 전 KBO 총재대행은 건재했다. 비록 세월에 무게감에 짓눌려 어깨가 약간 굽긴 했으나 여전히 승용차를 이용하는 대신 걷기를 고집하면서 건강한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만나자마자 이용일 총재대행은 대뜸 “잘 못 생각한 총재들 때문에 도대체 발전이 없어. 프로야구는 그냥 스포츠가 아니야. 비즈니스야. 흑자가 나야지. 그러면 각 구단의 전력이 평준화를 이룰 수 있고, 평준화가 되면 관중들이 더욱 흥미를 갖게 돼 구장이 들어찬다”면서 미국의 메이저리그나 NFL 커미셔너의 예를 들며 열변을 토했다.
그가 그렇게 강변하는 데는 충분한 까닭이 있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이 모두 흑자구조로 선순환하는 데는 버드 셀릭이라는 유능한 커미셔너가 21년간이나 재임하면서 적극적으로 중계권료를 해결하고 구단들의 구장 확충, 신설을 유도, 20개 구장을 새로 짓게 만드는 등 전력 평준화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는 어떻게 된 게 광주 구장을 2만 5000석으로 만드니까, 다른 데도 다 따라 합니까. 4만 5000석도 있어야지. 그걸 설득하는 게 커미셔너의 일이야. 커미셔너는 군림하지 말고 앞장서서 일해야지”
‘스포츠 비즈니스와 흑자구단’은 그가 틈날 때마다 프로야구계에 던지는 지론이자 역대 커미셔너(총재)들이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영원한 숙제이다.
1980년에 쿠데타로 권력을 틀어쥔 전두환 정권은 사회정화위원회라는 서슬푸른 기구를 만들어 무소불위의 칼을 휘둘렀다. 1983년 6월 1일 MBC 청룡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경기에서 김진영 삼미 감독이 판정에 불만을 품고 이기역 심판위원장에게 두 발 치기를 하다가 구속된 사건이나, 같은 해 6월 14일 대전구장에서 김응룡 해태 타이거즈 감독이 경기 후 심판실로 쳐들어가 과격하게 항의를 하다가 경찰서에 연행된 사건 같은 것도 사회정화위원회가 작동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이용일 당시 사무총장이 직접 나서서 ‘해결사’가 돼야 했다. 그의 확고한 생각은 스포츠에 공권력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지만 우리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야구판의 자정력과 자체 해결 능력이 부족했고, 외부 입김이 작용할 요소가 그만큼 많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시절, 이용일 총장이 기민하고 과감하게 대처했기에 ‘격렬한 프로야구판’이 굴러갈 수 있었다. 든든한 울타리이자 방패막이로 서종철 초대 커미셔너가 자리 잡고 있었고, 둘은 초대 총재와 총장으로 호흡을 기가 막히게 맞추었다. 이용일 총장은 프로야구가 외압에 휘둘리지 않았던 것은 서종철 총재의 영향력이 “100%”라고까지 말했다.
서종철 총재의 육군참모총장 시절 수석 부관 출신이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정권을 잡은 뒤에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서종철 총재를 국방부 장관이나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등으로 예우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청와대나 사회정화위원회 같은 곳에서 서종철 총재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 배경을 이용일 사무총장이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고 봐야겠다. 이용일 총장도 그 점을 시인했다.
“재임 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는가. 해태 버스 방화 때가 가장 큰 위기 상황이 아니었나”라는 물음에 이용일 총장은 “위기가 꽤 있었다. 김진영 감독 구속이나 김응룡 감독 입건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내가 다 해결했다. 김응룡 감독이 대전경찰서에 붙들려 갔을 때도 정화위원회 관계자에게 ‘이건 각하(전두환)가 허가해서 만든 프로야구다. 스포츠라는 것은 과격하게 싸워서 이기려고 하는 것이고, 정열이 필요하다. 일일이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은 프로야구를 하지 말라는 얘기다. 내보내면 내가 책임지겠다.’”
이용일 총장의 옛 얘기를 들어보노라면, 그의 과감한 결단력, 명석한 판단이 흔들릴 수도 있었던 프로야구 기반을 바로 잡았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앞머리에 언급한 ‘해태버스 방화사건’은 이용일 총장만 빼놓고는 주위에서 하나같이 대구에서 한국시리즈 4차전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시리즈) 3차전을 마치고 서종철 총재를 숙소로 모셔드린 뒤 구장 사무실로 다시 나가는데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이종남(작고) 기자가 ‘내일 또 어떤 폭동이 일어날 줄 모르는데 서울로 가서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밤 11시가 넘어 숙소에서 안의현 총무부장과 박현식 심판위원장, 김창웅 홍보실장 등과 함께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창웅 홍보실장도 이종남 기자와 같은 소리를 했다.”
이용일 총장은 그런 얘기는 프로야구를 그만두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대구를 떠나면(경기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대구에서는 해태와 삼성의 경기를 다시는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 서종철 총재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했다.
이튿날 이용일 총장은 이른 시각에 서종철 총재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마침 경북경찰국장이 서 총재의 육군 대령 출신 후배였다. 이 총장이 서 총재와 함께 경북경찰청을 방문, 경찰국장을 만나 “오늘 경기를 안 하고 서울로 가면 그다음부턴 대구에서 해태 경기를 다시는 못하게 된다”며 협조를 요청하자 “경기를 원활히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 테니 염려 마십시오.”라는 답을 들었다. 그해 한국시리즈 4차전은 경찰의 삼엄한 경비 속에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내가 총장을 할 때 제일 신경을 쓴 일이 그 사건이었다. 위기였다기 보다는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담이었다.
이용일 총장은 재임 시절 구단 확충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프로야구가 비즈니스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단 추가 창단이 필수적이라고 인식했다.
제7, 8 구단인 빙그레 이글스(한화 이글스 전신)와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과정에는 비즈니스 영역 확장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애초 대전 연고 구단은 동아건설이 유력했다.
“OB가 3년 만에 서울로 옮겨가 대전이 비게 되니까 한화가 적극적으로 나왔다. 동아건설의 최원석 회장이 전두환한테 좋은 인상을 주었던지 청와대는 처음부터 대전 연고 구단은 동아건설을 밀었다. 최원석과 두어 번 만났는데 처음에는 하겠다더니 나중에는 가입금 30억 원을 낼 수 없다고 했다. ‘아니, 그동안 6개 구단이 이 정도로 상권 만들었는데 고마운 뜻으로라도 가입금을 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라고 하자 최원석이 ‘국민이 납득을 못한다’고 했다. ‘국민이 가입금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돈을 안 주려고 별소리를 다 듣는구나 싶었다. 청와대에 들어가 동아건설은 안 되겠다고 설명하자 대안이 있느냐고 물어 한화를 시켜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게 됐다”
동아건설이 발을 뺀 것은 표면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가입금’을 명분 삼기는 했으나 만년 적자를 벗어나기 힘든 구조에 지레 손사래를 쳤다는 해석도 있다.
쌍방울은 구단을 만들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제8 구단으로 전북을 연고로 나서는 마땅한 다른 기업도 없었다. KBO로선 7개 구단 홀수 체제로는 날마다 쉬는 팀이 생겨 한시바삐 짝수 구단으로 맞춰야 할 판이었고, 쌍방울은 당시 무주 리조트 개발에 목을 매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다시 이용일 총장이 나섰다.
“청와대를 찾아가 쌍방울밖에 할 수 있는 기업이 없다고 설득했다. 쌍방울은 그때 무주리조트 허가를 못 받고 있었던 데다 국가 소유 땅을 일부 매입해야 했다.”
결국 쌍방울은 야구단 창단을 조건으로 무주리조트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어느덧 ‘망백(望百)’에 이른 이용일 KBO 초대 사무총장의 시선은 요즘도 변함없이 ‘흑자 프로야구단’에 쏠려있다. 그 게 그가 앞장서 만든 한국프로야구의 바람직한 미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커미셔너는 군림하려 들지 말고 모름지기 ‘비지니스’를 위해 발 벗고 뛰어야 한다는 그의 쓴소리가 더욱 와닿는 ‘한국프로야구 40년’의 현재이다.
글/ 홍윤표 OSEN 고문
사진/(위) 이용일 초대 사무총장의 모습
(아래) 이용일 사무총장이 입안했던 ‘한국프로야구 창립 계획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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