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한 군사정권 시대의 증언과 그 투쟁기’, 이효인의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22.02.08 10: 21

[OSEN=홍윤표 선임기자]군사 쿠데타 정권 시대의 민주화 운동 역사는 분야별로 체계적인 정리가 그런대로 돼 있으나, 특정 분야, 특히 영화계의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사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이효인 경희대 연극영화과 교수의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가 주는 충격은 간단치 않다.
지난해 연말에 나온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한상언영화연구소 발행)는 이효인 교수가 체험한 박정희 유신정권 말기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민주화 운동 이력을 갈무리해놓은 후일담 같은 것이다. 필자는 이 기록을 ‘작은 역사’라고 겸양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인 소사(小史)의 틀을 넘어 엄혹했던 시대, 민주화 운동의 보편성과 영화 운동의 특수성을 아우르는 이야기의 힘을 지니고 있다.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 서슬푸른 군부 정권 속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던 반동(反動)의 굼틀거림과 출렁임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종언(終焉)을 고한 군사정권 시대의 세밀한 기록집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는 그야말로 그 시대의 사초(史草)로 자리 매겨 마땅한 서술이다.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는 노무현 정부 시절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지낸 이효인 교수의 청년기 체험(1978-1992)을 마치 세밀화처럼 상술해놓았다.
이 책은 크게 필자가 학생운동의 일원으로 겪은 ‘유신과 군사정권 시기의 작은 역사’와 영화운동 진영에서 활약한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로 나누어 놓았다.
이효인 교수 개인의 체험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중요 순간들을 살피고 있는 이 책은 영웅들의 거대 서사만큼이나 큰 의미가 있는, 현장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들로 구성된 작은 역사 쓰기의 하나이다.
이 교수는 유신 말기인 1978년 경희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후 서양사상연구회를 통해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유신의 몰락과 1980년 ‘서울의 봄’을 통해 희망과 좌절을 겪으며 새로운 전망에 대해 고민했던 그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 아래 심신이 망가진 채 군대에 갔다.
군대 제대 이후 그는 영화 운동 진영에 관심을 두고 1985년 서울영화집단에 가입했다. 1986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인해 고통받는 축산농가의 현실을 담은 영화 ‘파랑새’(1986)를 홍기선, 이정하 등과 함께 제작했다가 구속됐다. 세칭 ‘파랑새 사건’은 영화계 최초의 시국사건으로 그 파장이 컸다.
이 교수는 1988년 영화평론가 이정하와 함께 ‘민족영화연구소’를 세우고 할리우드영화 직배 반대 투쟁을 비롯해 민족영화론에 기초한 이론투쟁과 전국의 파업현장과 시위현장을 영상으로 기록하여 전국의 노농 현장에 보급하는 식의 영화활동을 전개했다. 민족영화연구소는 한때 수십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었던 대표적 영화운동조직이었다.
1991년 급격한 국제정세 변화와 회원들 사이의 운동 노선의 차이로 민족영화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소장 평론가로 이름이 알려진 그는 강화도에 칩거하여 대표적인 한국영화사 저작인 『한국영화역사강의 1』(1992)을 집필한다. 이 책은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 유현목의 『한국영화발달사』에 이은 대표적인 한국영화사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92년에 이태리 페사로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주간 행사를 기획, 그 실무를 맡았다. 그때 페사로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한국 측 인사들은 국내에서 개최하는 국제영화제 설립을 꿈꾸었다.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대가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이효인 교수는 “기억이란 그 주체의 선택인 동시에 운명이다. 이 선택과 운명들이 모여 역사와 사회를 이룬다”면서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내 세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종말과 이어진 또 다른 군사정권의 시대, 그리고 냉전의 종말을, 한국영화계가 긴 불황과 타락, 그리고 무지의 늪에서 헤매던 때와 세계적 수준의 영화로 성장하던 시기를 목도했다”는 풀어내는 글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말석이나마 학생운동의 한 구석에서 생활하였고, 뉴웨이브 영화의 조성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탰던 것은 영웅들의 ‘큰 역사’가 아닌 사소한 개인의 ‘작은 역사’로서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증언과 기록에 의미를 부여했다.
『한국 뉴웨이브 영화와 작은 역사』는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옛 기억들을 정리한 것이기에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들이 많다. 필자는 1970년대 경희대 학생운동권이었던 ‘문재인 선배’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직접 시위를 도모하는 운동과는 선을 긋고 있는 다른 선배들과는 달리 사법시험 기간에도 시위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써주거나 개인적 차원에서 시위에 참여한 모습 등을 그려내고 있다.
이 교수가 ‘지미필름’에서 일하던 때 충무로에 만연했던 촌지 문화에 대한 증언은 비단 영화계뿐만 아니라 언론계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 널리 번져있던 타락상을 고발한 것으로 낯 뜨거운 그 시대의 자화상이다.
이효인 교수는 “제가 펴낸 책은 개인의 작은 기록에 불과하지만, 아마도 비슷한 경험과 생각을 가진 많은 독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학술적 자료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모두가 이런 기록을 남겨서 더 나은 사회를 향하는 작은 돌이 되고,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 책을 펴낸 ‘한상언영화연구소’는 남북한 영화 및 동아시아 영화 자료의 체계적 수집과 전시, 연구를 위해 2018년 4월 설립한 학술연구기관이다.
현재 이 연구소는 북한에서 발행된 단행본과 잡지 등, 총 5,000여 점이 넘는 방대한 문헌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연구소는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북한에서 발행한 문학예술 도서 250점을 전시했던 ‘평양책방’을 2018년 서울도서관에서 개최,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았다.
2020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박물관과 함께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해방공간의 영화인들’이라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기념전시회도 열었다. 연구소의 주요 출판물로는 『평양책방』(2018), 『월북영화인 시리즈 1~3권』(『문예봉 전』, 『강홍식 전』, 『김태진 전』)(2019), 『멜랑콜리 연남동』(이효인 저) 등이 있다.
한상언 소장은 “이번에 낸 책은 1980년대를 관통했던 한 영화인의 회고기로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유신 말기를 시작으로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는) 개인의 체험을 담담하게 풀어낸 글이다”면서 “ 이 책을 읽다보면 격동의 현대사와 함께한 어느 영화인의 젊은 날 개인사가 어떻게 우리 격동의 현대사와 조우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게 된다. 영화인 개인의 작은 역사가 영화사의 중요한 사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재확인하게 된다.”고 평했다.
한상언 소장은 아울러 “그 시대상을 읽을 수 있는 이 책은 영화연구자들한테는 반드시 필요한 시대의 증언과 기록”이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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