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40년 비화]⓷한국 프로야구 원년 우승 감독 김영덕, “OB 우승은 기적이었다”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21.03.04 14: 20

‘처음’은 사전 풀이로는 ‘맨 첫 번’, ‘맨 앞’을 일컫는다. 한국 프로야구 40년 역사에서 ‘처음’ 작성된 기록 가운데 으뜸은 아무래도 1982 프로야구 첫해 OB 베어스(두산 베어스 전신) 우승과 박철순의 22연승을 꼽을 수 있겠다. 당연히 첫 우승은 영원히 깨질 수 없는 기록이고, 박철순의 기록은 앞으로 한국 야구사에서 ‘영원불멸’의 대기록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비록 어설프고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한국 프로야구 첫 장에 있었던 기록이지만 마치 첫사랑과도 같이, 그 기록은 아련하고 애틋하다. 아릿한 상처의 흔적도 남겼다. 그 기록의 배경에는 김영덕(86)이라는 지도자가 자리 잡고 있다.
김영덕은 1936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1956년에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 구단에 입단, 8년간 몸담았다. 큰 빛을 보지 못했던 난카이 생활(1959년 1군에 데뷔, 6승 6패 평균자책점 3.09, 1963년까지 4시즌 동안 7승 9패 평균자책점 3.57을 기록)을 뒤로하고 1964년에 모국을 찾아와 실업야구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했다.

잘하는 투수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던 시절이었다. 국내 실업야구 무대는 신용균, 김성근, 김금현, 배수찬 등 재일교포 출신 투수, 타자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귀국 첫해, 김영덕은 33경기에 나가 무려 255이닝을 던져 평균자책점 0.32로 방어율(당시 타이틀) 1위에 올랐다. 더욱 놀라운 점은 고순선(9월 23일 철도청전)에 이어 김영덕이 9월 25일 조흥은행 경기에서 퍼펙트게임의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김영덕은 그 후 크라운맥주를 거쳐 한일은행으로 옮겨 1967년에 정점을 찍었다. 그해 팀 32경기 가운데 25경기에 등판했다. 혼자서 던지다시피 하며 17승 1패(승률 9할9푼4리), 평균자책점 0.49, 54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 독무대를 이뤘다. 1968년 10월 3일 육군과 경기에서는 노히트노런도 기록했다.
1970년에 실업 2차리그 후에 한일은행 지휘봉을 쥔 김영덕은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971년 제9회 서울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는 1차 리그에서 5개국 가운데 4위로 처졌던 한국을 2차 리그부터 감독대행을 맡아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그 공로로 그는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김영덕은 1971년 김응룡(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회장)에게 한일은행 감독직을 물려준 뒤 은행 업무를 보다가 1977년에 장충고 감독을 시작으로 야구 현장으로 복귀, 북일고를 거쳐 1982년 OB 베어스 초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오랜만의 통화였다. 1936년생으로 아흔을 저만치 앞에 두고 있는 김영덕 전 감독은 요즘 기력이 떨어져 바깥나들이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 2017년에 통화했을 때는 “나이 여든이 넘었는데 하루하루가 힘들다. 일요일만 빼고 매일 아침에 집 근처 개천가를 40분 남짓 산책하고 있으나 계단을 올라가는 것도 힘들다”고 전했던 그는 최근 건강이 더 나빠진 듯했다.
용인 수지구에서 사는 그의 굵은 음성은 여전했으나 “나이 들어 어지러움이 심해져 머리가 흔들려 산책도 못 한다. 천안 망향 동산에 부모님을 모셔두었는데, 5년 전부터 가지도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안 좋다. 거기도 못가 볼 정도로 이렇게 변해버리네…”라며 한탄했다.
직접 만나기가 어려워 전화로 김영덕 전 감독에게 몇 가지를 집중 질문했다. OB 우승과 박철순, 그리고 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특정 선수들 ‘기록관리’에 대해서.
김영덕 전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 전술의 개척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치밀한 운용 능력과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해 승리를 따내는 재주는 아무도 흉내 낼 수조차 없었다.
김영덕 감독은 OB 맥주 사장을 지낸 당시 최인철 대한야구협회장의 권유로 1982년 1월에야 OB 베어스 감독을 맡게 된다. 참고삼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그의 회고록을 살펴봤다.
“OB의 원년 우승은 사실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멤버 구성을 끝내고 솔직한 나의 예상은 잘하면 3등, 실력대로면 4, 5등이었다. 우승이 가능했던 것은 출범 첫해 모든 팀이 허술했다는 것과 김성근 감독(연재 당시 OB 감독)이 도맡은 투수 로테이션이 딴 팀보다 앞섰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빼놓을 수 없는 것에 돈의 위력도 있다.”(1987년 3월 20일 치 일간스포츠 ‘김영덕의 나의 프로야구’에서 부분 인용)
회고록에서 술회했던 대로 “내가 볼 때 OB 베어스의 우승은 기적이었다”고 김영덕 감독은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가 언급했던 ‘돈의 힘’은 바로 ‘은퇴할 나이였던’ 윤동균, 김우열(둘 다 1949년생, 당시 33살)과 계형철(1953년생), 김유동(1954년생) 등 노장들이 프로로 전향한 것을 일컫는다. 요즘에야 나이 30대 초, 중반은 한창때라고 하겠지만 그때만 해도 선수 적령기를 훌쩍 지난 터였다.
“야구 멤버를 보면 그때 당시 삼성이 최고였고, 그다음으로 MBC가 괜찮았다. 나는 사실 박철순의 실력을 몰랐다. 미국 트리플에이(A)에 있다는 얘기만 들었다. OB 연고가 대전이어서 지역에 선수가 없었다. 서울 MBC가 먼저 뽑고 우리가 뽑아야 했다. 윤동균, 김우열은 실업야구에서 나와서 은퇴할 나이였다. 우승이 아니라 하위권으로 본 건데, 뚜껑을 열고 보니까 (김)우열이, (윤)동균이 이런 노장 선수들이 잘 이끌어줬다. 박철순이 생각보다 잘 던졌다. 일본에서 8년 경험은 난카이의 스기우라처럼 에이스를 혹사하는 야구였다. 에이스는 거의 매일 던지다시피 했다. 나도 그 야구밖에 몰랐다.”
그는 누차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박)철순이 한테 고맙고, 미안하다. 나 때문에 선수 수명이 짧아졌다”면서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때는 선수들을 너무 혹사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훈련도 많이 시켰으나 요즘처럼 과학적인 훈련이 아니었다”고 돌아봤다.
1982년에 박철순은 페넌트레이스에서 팀 경기수(80게임)의 절반에 가까운 36게임에 등판, 24승(22연승) 2패를 기록했다. 아쉬우면 그를 마운드로 불러냈다는 얘기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OB는 1무 1패 후 4연승으로 초대 챔피언이 됐다. 박철순은 위기 때마다 진통제 주사를 맞고 등판했다. 시리즈 3, 4차전에서 구원 등판, 승리를 지켜냈고, 최종 6차전에는 역시 진통제를 맞고 선발 등판, 완투승을 따냈다.
출범 당시 어느 구단 할 것 없이 코칭스태프는 감독 외에 투수, 타격 코치 한 명씩이 고작이었다. 1982년 한국야구위원회(KBO)가 펴낸 ‘1982 한국프로야구 선수일람표’를 보면 6개 구단별로 선수라야 스무 명 남짓이었고 OB는 그나마 24명으로 많은 축이었다. 해태 타이거즈는 14명에 불과했다.
김영덕 감독은 일본에서 배운 대로 ‘혼자 하는 야구’에 익숙했다. 흔히 OB 우승 뒤에는 박철순의 혹사를 거론하지만, 그때는 그 게 정상적이었다. 김영덕 감독은 그 얘기를 꺼내며 웃었다.
“허허, 난카이(호크스)에서 8년간 당시 일본 최고 감독이었던 쓰루오카 밑에서 배운 야구였다. 그때(난카이 시절) 야구는 에이스 혹사를 당연시했다. 나도 한국에 나와 아마추어 때 혼자 다 던졌다. 프로야구에서도 에이스를 계속 쓰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박철순이 계속 던져 허리를 다치고 선수수명이 단축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호세이대학 때부터 명 3루수로 이름을 날렸던 쓰루오카 가즈토(鶴岡一人)는 그가 수비하는 3루를 두고 ‘쓰루오카 지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고, 난카이 감독을 맡아 리그 우승 11회, 저팬시리즈 우승 2회를 달성했던 명지도자였다. 쓰루오카 감독 시절 김영덕 감독과 함께 선수생활을 했던 스기우라 다다시(衫浦忠)라는 투수도 1959년에 혼자서 무려 38승을 거두며 그해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MVP를 독식했다. 그는 그해 요미우리와의 저팬시리즈서 마치 최동원의 1984년을 연상케 하는 4연속 등판으로 팀 우승을 일궈낸 투수였다.
어쨌든 김영덕 감독의 ‘에이스 의존과 믿음’은 그의 실토대로 쓰루오카의 영향이 컸다. “그때는 그게 당연하다고 봤다. 한사람에 의존하는 야구 시대였다. 박철순이나 최동원을 혹사한 그게 정상적인 야구였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요즘 야구는 그때와 너무 차이가 나고 많이 변했다.”
김영덕 감독은 OB를 거친 뒤 삼성 라이온즈 감독(1984~1986년)과 빙그레 이글스 감독(1988~1993년)을 지내면서 특히 이만수(삼성)와 고원부(빙그레) 같은 타자들의 타율을 관리해주는 바람에 달갑지 않은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심지어는 그가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한 것”이라고 자신의 기록관리를 합리화했다는 말도 떠돌 지경이었다.
이만수의 타격 3관왕 만들기는 그의 대표적인 선수 타율 관리 사례다. 그와 관련, 김영덕 감독은 “1984년에 쏟아진 비난에는 져주기, 한국시리즈 패배와 함께 이만수를 타격 3관왕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도 포함돼 있다. 당시 1백 게임 중 81게임을 치른 8월 26일 현재 이만수는 타율, 홈런, 타점 3개 부문 선두였다. 홈런과 타점은 2위와 차이가 났지만(…), 타율은 다소 관리를 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일간스포츠 1987년 3월 28일 치 회고록 가운데 발췌 인용)
김영덕 감독은 프로야구는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남는 것은 기록이다. 10년 후 또는 그 이후 한국프로야구 최초 타격 3관왕은 이만수였고 당시 성적은 분명 기록으로 남는다. 반면 그때 이만수가 막판 7게임을 타석에 나오지 않았고 타율 경쟁자 홍문종에게 9타석 연속 볼넷을 내준 결과였다고 기록되지는 않는다.
김영덕 감독은 그렇게 믿었다. 그로 인해 불어닥칠 엄청난 후폭풍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이만수는 그 기간에 계속 뛰겠다고 감독에게 얘기했다. 김영덕 감독은 말렸다.
“기록관리는 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도자로서 가장 존경했던 쓰루오카 감독도 그렇게 했다. 기록이라는 것은 만들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있으니까. 어떤 때는 상대방의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비난은 순간, 기록은 영원’이라는 항간에 전해 내려오는 김영덕 감독의 ‘어록’은 사실일까. 그 점에 대해 그는 “내가 그런 능력이 없다. 어떤 기자분이 (그런 식으로) 얘기했는데, ‘맞습니다’고 수긍한 것이 그만…”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가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한 것은 그때만 해도 우리말에 서툴러서 그런 ‘조어(造語)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김영덕 감독은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라며 “허허허” 웃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이라는 짓궂은 물음에 “지금 야구는 너무 많이 발전했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나 기록관리는 좀 생각해봐야겠다. 당연히 한다는 아니고, 만들어준다고 반드시 타자가 할 수 있겠나. 물론 개인적인 것도 있다(호불호를 뜻함). 다만 한가지 (예전엔) 마음속으로 이놈이 됐으면 그런 마음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배성서 창단 감독에 이어 그는 1988년에 빙그레 이글스 2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한화그룹 창시자인 김종회 회장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그는 “김승연 회장이 원한다고 해서 빙그레로 가게 됐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그는 가자마자 그해 팀을 리그 2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시켰다. 1989년과 1991, 1992년에도 2위로 팀이 한국시리즈에 나갔지만 줄기찬 공세에도 해태 타이거즈의 벽에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물렀다.
“빙그레로 가 6년 동안 4번 한국시리즈에 올라갔는데 다 깨져 너무 아쉽다. 하위권이었던 빙그레를 일약 우승할 수 있는 강팀으로 만들었는데, 한번이라도 우승을 했더라면 (김승연)회장님과 팬에 보답했을 텐데…”
빙그레 시절을 떠올리며 못내 아쉬워하는 그의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읽힌다.
“평생 야구만 했는데, 요새 낙은 집에서 야구 중계가 시작되면 티브이로 관전하는 것이다. 그래도 전에는 구장에 가끔 나가 사인공(한 다스)을 7만 원인가에 사서 주위에 나눠주는 재미라도 있었는데…”라는 그의 말끝에서 진한 쓸쓸함이 묻어난다.
글/ 홍윤표 OSEN 고문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