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40년 비화] ⓵최초 기획 홍윤희 옹, “1976년에 박정희 압력으로 좌절” 충격 증언

[프로야구 40년 비화] ⓵최초 기획 홍윤희 옹,...


[편집자 주(註)]2021년은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1981년 12월 11일 창립총회) 40주년을 맞는 해다. 6개 구단으로 시작했던 KBO 리그는 10팀으로 늘어났고, 질량 면에서 눈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몰라보게 발전했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이른 한국 프로야구 출범의 주역들 가운데는 이미 옛사람이 된 이도 많다. 뒤늦게나마 생존해 있는 그때의 주역들을 찾아 ‘숨겨진 일화’를 다시 들어봤다. (OSEN=홍윤표 선임기자)

“한국 프로야구의 태동은 재미 실업가인 홍윤희가 국민의 여가 선용을 위해 프로야구가 절대로 필요하다는 뜻을 품고 1975년 11월에 귀국, 야구인들의 의견을 타진하면서 비롯됐다. 홍윤희는 야구인들과 접촉, 실업야구 프로화 길을 모색했고 호응을 얻자 일단 미국으로 돌아가 추진에 필요한 경비 20만 달러를 준비해 1976년 초에 재입국, 가칭 ‘한국성인야구 재건위원회’ 회장을 맡고 실업야구연맹 임원 등 8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임, 2월 5일 프로화 작업 추진을 공식 발표했다.”

『한국야구사』(1999년 대한야구협회․ 한국야구위원회 펴냄)를 들춰보면, ‘프로야구 작업 태동’(788쪽)과 ‘민간의 프로화 추진’(1157쪽) 항목에 한국 프로야구 탄생의 움직임을 그렇게 설명해 놓았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전 단계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인물이 바로 『한국야구사』에 나온 그대로 재미 실업가로 지칭된 홍윤희 씨(洪允憙. 92)다. 비록 중동무이 됐으나 그가 기획, 입안했던 ‘한국성인야구재건안(韓國成人野球再建案)’이 오늘의 한국 프로야구 밑거름이 됐다. 홍윤희 씨는 1975년에 한국프로야구를 최초로 착안했던 인물이었다. 홍 씨는 지난 2012년에 KBO를 방문, 자신이 수립했던 ‘한국성인야구재건안’ 원본을 건네줬다.


‘한국직업야구계획’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고, ‘한국성인야구재건위원회, 한국직업야구준비위원회’가 만든 것으로 돼 있는 ‘한국성인야구재건안’(이하 재건안)은 표지를 포함, 모두 37쪽 분량이다.

『한국야구사』에 따르면, 성인야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고 한편으론 타성에 빠진 실업야구를 중흥하는 방안을 강구하던 실업야구연맹 임원들은 홍윤희와 더불어 ‘한국직업야구준비위원회’를 만들고 박정희 대통령과 문교부, 대한체육회에 건의서와 진정서를 내는 등 활발한 프로야구 창설 작업을 폈다.

추진위원회에 참가한 인사는 장태영(상업은행 야구부장), 허종만(육군 감독), 김계현(한전 감독), 이호헌(실업연맹 사무국장), 하정규(농협 감독), 정두영(철도청 감독) 등이었다. 위원장에 선임된 홍윤희는 미국에서 콘크리트 조립식 전선관을 제조하는 KC 인터내셔널을 운영하는 기업인이었다. 이들 추진위원 외에 유백만(상업은행 감독), 남승진(공군 감독), 김응룡(한일은행 감독), 김성근(기업은행 감독), 김양중(기업은행 야구부장), 김재송(실업연맹 감사) 등도 참여, 야구계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프로야구 발족을 추진했다.

1975년 11월 8일 실업야구연맹 이사회는 직업야구 창립계획을 승인한 데 이어 1976년 1월 6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 광원빌딩 홍윤희 사무실에서 정식 추진위원회를 결성했다. 추진위원회 위원장은 홍윤희가 맡지만 사단법인 등록 후에는 원로인사를 영입해 위원장(커미셔너)으로 선출하기로 했다. 추진위는 계획안을 1976년 3월 6일에 외부에 공표했다. 그러나 대한야구협회는 이를 검토하고 시기상조로 판단해 프로야구 창설 작업은 전면 보류 됐다.

홍윤희 씨의 주도로 작성한 ‘한국성인야구재건안’은 1976년을 기점으로 1980년까지 프로야구를 정착시키기 위한 5개년 계획으로, 발족 후 5년 안에 프로로 정착시킨다는 단계적인 발전안이었다.

재건안은 서문과 실업야구 5개년 계획 대요, 효과 및 전망, 제1차 연도 운영안, 직업야구 운영안(제2, 3차 연도), 용산구장 건설안, 나이트시설 건설안, 종합 소요자금 조달안, 주요 추진상황 초안, 대정부 건의사항, 구장 조감도, 실업야구연맹 결의문 등으로 구성돼 있다.

『한국야구사』에는 “추진위가 이 같은 계획서를 놓고 그해 3월 3일 문교부, 내무부, 상공부, 재무부, 대한체육회 등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었으나 결론을 못 냈다. 대한체육회가 10개 실업팀의 지방 분산에 강하게 반대했고, 대한야구협회도 9월 대만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대회 주축 선수들의 프로 진출 용인 못 한다고 제동을 걸었다”고 정리했다.

홍윤희 씨는 프로화 추진이 벽에 부닥치자 두 손을 들고 1976년 3월 15일 식구들이 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큰 꿈이 물거품 됐다.

결과로 말하자면, 그럴싸한 이 추진계획은 속절없이 무산됐다. 여태껏 그의 계획이 대한야구협회의 반대로 좌초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다른 속사정이 있었음이 새삼스레 밝혀졌다.

홍윤희 옹은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했다. 서울에 머물러있는 그를 새해 초에 직접 만났다.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했고, 눈빛은 빛났다. 홍윤희 옹은 이번 만남에서 한국 프로야구 최초 추진이 좌절된 일과 관련,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일단 그의 원대한 계획이 왜 무산됐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자.

2013년 2월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 21부(재판장 이원범)는 1950년 6·25 전쟁 초기에 북한 인민군의 총공격 계획을 국군에 제보하고도 오히려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홍윤희 씨(당시 83세)에게 63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홍윤희 씨는 1950년 9월20일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뒤 10년 징역 확정, 복역 중 1955년에 가석방 됐다. 1973년 박정희 유신정부의 사회안전법 발의로 인한 학살 두려움으로 그해 12월에 미국으로 망명 이민했다.

그는 미국에 머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한·미 양국의 전쟁 기록을 뒤져 2011년 봄 자신에 관한 기록을 기어코 찾아내 그해 6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 마침내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다.

한국전쟁사의 권위자인 로이 애플먼의 ‘홍의 정보(The Hong’s information)’라는 메모에서 ‘홍 씨가 (1950년) 9월 총공격을 국군에 제보했다’는 내용이 그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실마리가 됐다.

홍윤희 옹이 한국야구 프로 추진 작업에 관여하게 된 직접 동기는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경제부총리를 역임했던 고 장기영 한국일보사 창업주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장기영 씨 때문에 하게 됐다. 장기영 씨는 나하고 이웃에 살았고 우리 집안도 아주 잘 안다. 잘 알아서 나하고 얘기했는데 한번 해보라고 그래서 장훈과 백인천, 김일융을 데리고 와 데몬스트레이션 게임(1975년 10월 말에 열렸던 재일교포 혼성팀 모국 방문 경기를 말함)도 했고, 그다음에 바로 내가 프로젝트(미국식 프로야구)를 내놓은 것이다.”

그는 재일교포야구단의 모국 방문경기를 주선하는 한편 실업야구를 운영하고 있는 기업체를 찾아가 발전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부 기업체장이 야구인을 기생충 취급하는데 충격을 받고 자립형 프로야구 추진이 절실하다”는데 이르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야구선수들이 은행이나 교통부(철도청) 같은, 팀 있는 데서 그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멸시를 당하고 있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고 있다. 그러지 말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닦아주자, 그 게 취지였다. 야구는 프로를 해야 발전할 수 있다. 관에서 주도하는, 권력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인권 면에서도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잘하고 있는데 우리라고 못 할 것은 없지 않으냐. 처음부터 시기상조 운운하는데, 내가 뭐 정부에 돈 바라고 하는 게 아니라 뜻이 있어서 하는 것이니까. 절대 정부에 돈 달라고 안 하겠다, 뜻이 있어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스템을 바꿔서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당장 프로로 간다는 것보다도 2, 3년 실행하고 프로로 정식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그렇게 했다.”

그는 장기영 사장과 의논 끝에 미국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여러 구단을 방문, 기초자료를 수집해 ‘성인야구 발전안’을 마련했다. 그 계획안은 장기영 사장도 열람, 동의를 얻은 뒤에 본격적으로 프로야구 추진 발기인들을 규합하게 됐다.

홍윤희 옹이 장기영 한국일보사장의 권유로 기본계획안을 작성한 것이 1974년 11월께였다. 그는 그 계획서를 청와대의 정상천 제2수석비서관, 선우련 공보비서관에게 전달했다. 이듬해인 1975년 1월에 문교부 체육국에서 본격적인 검토를 시작했다.

홍윤희 옹은 “그 무렵 서울 을지로 입구 아서원에서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 프로야구 추진 기자회견을 했다. 그 후 중앙정보부(KCIA) 김기춘 감찰실장 밑에 있던 김문수 씨의 소개로 김치열 내무부 장관을 면담, 원칙적인 찬동을 얻었다.”고 초기의 움직임을 설명했다. 그해 2월에는 마산에서 기업체를 경영하면서 대한야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김종락 다코마 회장을 만나 추진 과정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김종락 회장이 ‘당신이 성인야구를 다 가지고 가면 나는 학생야구만 가지고 뭐하느냐’며 불만스럽게 말하길래 ‘내가 회장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연구한 것을 실무로 만들어보는 일 만하겠다. 원한다면 회장을 맡으라’고 했더니 ‘서울서 만납시다’고 의견를 나눈 뒤에 헤어졌다.”

김종락은 당시 박정희 정권 2인자였던 김종필 국무총리의 형으로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얼핏 순조롭게 보이던 이 계획은 뜻밖의 난관에 부딪혔다. 김종락은 물론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 신직수 KCIA 부장이 뒷전에서 반대했다. 김종락 회장은 연락이 없고 오히려 KCIA가 홍윤희 옹의 뒤를 캐게 했다.

군에서 인연이 있던 KCIA 김문수로부터 연락이 왔고, 착수 자금 20만 달러의 출처 등을 캐물었다. 홍윤희 옹은 이종사촌 형이었던 일본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의 심재인에게 부탁해서 마련한 것이라고 소명했다.

홍윤희 옹은 경북 문경 태생이다. 그의 형 심재인 씨는 박정희와 같은 경북 선산 출신으로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하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만주로 도피한 뒤 그 학교에 후임으로 근무했고, 나중에 영남대 대학원장도 지냈던 인물로 박정희의 속사정을 잘 아는 처지였다.

이런 곡절을 겪은 뒤 KCIA의 김문수가 “괜히 붙들려서 중정에 가면 달리니까(고문당하니까) 그러지 말고 나가라. 그러면 끝나는 것이다. 야구는 다음 해로 미루고 출국하라고 종용, 발기인들에게 사정을 간단히 얘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게 홍윤희 옹의 설명이었다.

홍윤희 옹은 미련이 남아 그해 7월에 안면이 있던 한병기 UN 공사한테 연락, 한국 프로야구 추진을 언급하자 “어떤 놈들이 이런 좋은 사업을 방해하나요. 같이 한국에 갑시다”고 제언, 9월에 다시 귀국했다.

한병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맏사위(전처소생 딸)로 이런 일은 박정희의 명령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으로 판단, ‘직보(直報)’ 하기로 홍윤희 옹과 의논을 마쳤다. 한병기는 귀국 후 그에게 서울 이문동 KCIA에 가서 ‘프로야구 추진과정을 설명해주라’는 요청을 받고 ‘자신의 과거’를 포함해 3시간가량 수사관에게 설명해주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홍윤희 옹은 한병기와 만난 자리에서 ‘박통(박정희)’이 프로야구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불호령을 내려 제대로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결국 KCIA 조사보고서가 ‘박통’에게 보고돼 6·25 당시 문제의 홍윤희가 생존해 있다는 것과 미국 망명 이민을 확인하고 한병기에게 프로야구 얘기를 하지 말라고 호통친 것으로 인식된다. ‘박통’이 자신의 치부를 숙지하고 있는 내가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광기가 생겼을 것이다.”

홍윤희 옹의 놀라운 증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거부로 결국 프로야구 추진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준다.

홍윤희 옹은 “내 외가가 선산에 있는데, 외사촌들이 ‘박통’의 집안 내력을 잘 알고 또 이종사촌인 심재완, 심재인도 ‘박통’의 집안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 ‘박통’의 피해의식이 발동한 것”이 프로야구 추진의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보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는 그의 일차 노력 뒤 6년이 지난 1982년에 마침내 개막전(3월 27일)을 갖게 된다.

홍윤희 옹은 그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전두환이 밀어줘서 우리 야구가 프로화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야구인들의 열의로 프로야구로 발전시킨 데 감사한다. 나는 비록 성사시키지 못했으나 좋은 스포츠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시작했다.”

역경으로 점철된 한평생을 보낸 그는 “나는 기구한 생애를 보냈고 보도연맹 학살 보복에 따른 수십만 살상을 방지했다는,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심정으로 살아왔다.”고 기개를 펼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사진](위)어느 날 서울의 지하철역에서의 홍윤희 옹의 모습.

(아래)홍윤희 옹이 기획, 입안했던 ‘한국성인야구 재건안’ 표지. /홍윤희 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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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1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