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강외유’ 혼다 파일럿, 대형 SUV가 갖춰야 할 덕목은?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20.12.24 09: 41

 몇 년 새 대형 SUV가 도로에 차고 넘친다. 차의 크기로 사회적 지위를 가늠했던 시절과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실용성과 확장성에서 연유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대형이기 때문에 사람을 태우거나 아웃도어 장비를 실을 때 여유가 있다. 제조사에서 플래그십으로 대우하기 때문에 각종 안전, 편의 사양도 최신으로 갖출 수 있다. 엔진 기술 발전으로 연비가 좋아지면서 유류비 부담이 준 것도 대형 SUV 인기의 배경이 됐다.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서 수입 대형 SUV 선택지가 포드 익스플로러, 혼다 파일럿 정도만 꼽힐 때가 불과 몇 해 전이다. 음식점으로 치면 원조격에 해당하는 차가 익스플로러와 파일럿이다.
불모지이던 대형 SUV 시장에 일찌감치 뿌리를 내리고 면면히 이어온 데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근 상품성 개선 모델이 출시된 혼다 파일럿을 다시 접하면서 ‘원조의 품격’을 음미해 봤다.

파일럿의 최대 시장은 사실 미국이다. 북미에서는 연간 10만대 이상씩 팔리고 있다. 저유가 시대가 다시 열리면서 미국 자동차 시장은 대형 SUV가 전성기를 맞고 있다. 파일럿은 그런 미국 시장에서 제대로 알아주는, 눈에 띄게 잘 팔리는 차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미국 소비자들이다. 그들에게 어필하는 요소가 많다는 얘기다. 
혼다 파일럿은 2003년에 태어났고, 2009년에 2세대, 2015년에 3세대로 진화했다. 우리나라에는 2012년부터 수입되기 시작했으니 2세대 모델부터 국내 시장에 들어왔다. 그러나 2세대 모델은 디자인이 투박해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고, 3세대 모델부터는 대형 SUV 시장을 상당 수준 잠식했다.
3세대 모델의 디자인은 무난한 편이다. 2세대의 투박함은 털어냈지만 그렇다고 티 나게 세련되지도 않았다. 무난한 디자인은 대형 SUV 수요자들에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어필했다. 대형 SUV 수요자들이 선호하는 디자인은 대체로 보수적이다. 
2021년형 혼다 파일럿은 11월 12일 출시됐다. 탑승자의 승하차를 돕는 편의사양, ‘러닝 보드’가 추가되고 디자인에도 약간의 손질이 가해졌다.
‘러닝 보드’로 불리는 발 디딤판은 대형 SUV 수요자들이 꽤나 신경 써서 따지는 사양이다. 차체가 높다 보니 디딤판 없이 한 번에 오르기가 쉽지 않다. 승차감은 물론 하차감까지 따지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에게 한 번에 쓱 오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자존심의 영역이다. 파일럿의 러닝 보드 아래쪽에는 승하차 시 땅 바닥을 비춰주는 스팟 라이트도 달았으니 작정하고 운전자의 자존심을 높여 준 셈이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한 장치는 또 있다. 차 문을 열면 사이드 스텝 가니시에 ‘PILOT’이라는 로고가 박혀 있는데 이 로고를 LED 타입으로 만들었다. 차 문을 열면 이 로고에 불이 들어온다. 이 또한 작은 배려이지만 디테일을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소소한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다.
‘모던하다’고 묘사되는 무난한 감성으로 차에 오르면 가장 먼저 속이 확 트인다. 앞뒤 전후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다. 대형 SUV에서 느낄 수 있는 위용이 시각적으로 느껴진다. 전장 5,005mm, 전고 1,795mm의 차체는 전방 시야에 막힘이 없다. 현대차 팰리세이드(전장 4,980mm, 전고 1,750mm) 보다 차체는 더 길고 높다. 여기에 아웃사이드 미러가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어 전후 좌우 시야에 막힘이 없다.
대형 SUV의 자랑이 ‘넉넉함’이라면 그 덕목은 엔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혼다 파일럿을 처음 접했을 때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게 엔진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다는 모순된 표현이 딱 맞다. 힘을 뺄 때와 실을 때를 정확히 알고 대응한다.
파일럿의 V6 3.5리터 직접분사식 i-VTEC 엔진은 최고출력이 284마력에 달한다. 이 정도 엔진 스펙이면 정차 상태에서도 그르렁거리게 세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일럿은 내강외유다. 고요히 명령을 기다릴 따름이다. 36.2kg.m의 최대 토크는 자연흡기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
전자식 버튼 타입의 9단 변속기는 내강외유의 파일럿 성격과 맞아떨어진다. 변속이 있지만 느껴지지 않는, 그림자 변속의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V6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대형 SUV이지만 복합연비는 8.4km/l로 인증받았다. 도속도로 연비가 10.0km/l인데 여유를 갖고 운전하면 이 보다 훨씬 높은 실연비를 얻어낸다.
운전조건에 따라 6기통 실린더의 작동이 3기통 4기통으로 자동 제어되는 ‘가변 실린더 제어 기술(VCM Variable Cylinder Management)’도 연비 향상에 도움을 주는데, 고속도로에서 정속 주행을 할 때 효과적이다.
오프로드 성능은 지능형 전자식 구동력 배분 시스템(i-VTM4)을 갖춘 AWD 시스템이 지지한다. 흙길, 빗길, 눈길처럼 가혹한 도로 조건에서 전륜과 후륜에 최적의 토크를 분배하는 기술이다. 정속 주행 때는 전륜 구동으로 운행해 연비를 높여주지만, 불안정한 도로 상황에서는 후륜에 구동력을 전달해 안정적인 핸들링과 주행을 돕는다.
정속 주행이 가능한 구간에서는 운전자의 피로도를 줄일 수 있는 반자율 주행 시스템, ‘혼다 센싱’이 쓰임새가 있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이 작동해 시속 30km 이상의 구간에서는 앞 차와의 간격을 알아서 맞춰 준다.
신호 구간에서 완전 정차했다가 앞 차를 따라 자동 출발하는 기능까지 등장하고 있는 판이라 혼다 센싱이 놀라울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운전자의 피로도를 줄여줄 보조 기능으로는 충분히 제 할 몫을 하고 있었다. 차선 유지 보조 시스템도 시속 72km에서 시속 180km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3세대 파일럿 출시 이후에도 자동차 업계의 자율 주행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간성은 2, 3열 폴딩 기능으로 활용성을 극대화했다. 2, 3열은 모두 다 접을 수도 있고, 6:4 분할이 가능해 필요한 자리만 접을 수도 있다. 특히 2열 시트는 버튼 하나로 접혀지며 3열 승객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준다.
적재공간은 마법처럼 조절이 된다. 3열 뒤 공간에 기본적으로 467리터의 적재공간이 있는데, 3열 시트를 접으면 1,325리터, 2, 3열을 다 접으면 2,376리터의 공간이 탄생한다.
스마트 기기 대응 노력도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 안드로이드 오토와 애플 카플레이를 지원하고 스마트폰 무선 충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원격 시동장치나 핸즈 프리 기능이 포함된 파워 테일게이트, 스마트 키를 소지한 채 차에서 멀어지면 차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워크 어웨이 락 기능, 1열 탑승객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2, 3열에 전달되는 ‘캐빈 토크’ 기능 등도 작지만 만족도가 높은 노력들이다.
작은 수고를 들어주는 편의사양보다 더 근본적인 자랑거리도 있다. 2018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IIHS) 자동차 안전성 평가에서 최고 수준인 ‘탑 세이프티 픽 플러스(Top Safety Pick+)’에 선정됐다는 사실이다. 대형 SUV가 갖춰야 할 덕목 중 제 1의 항목을 충족시키고 있다.
2021년형 파일럿으로 업그레이드됐지만 가격은 이전 모델과 동일한 5,950만 원(부가세 포함)이다. /100c@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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