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사 재발견](5)‘조선의 홈런왕’ 이영민, 『회심(會心)』 속에서 다시 찾다

[한국야구사 재발견](5)‘조선의 홈런왕’...


이영민(1905~1954), 그는 ‘조선의 홈런왕’이었다. 일제의 식민시대에 이영민은 조선의 자랑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종합 월간지였던 『동광(東光)』 제29호(1931년 12월 27일 발행)는 ‘조선이 낳은 10대 운동가’를 선정, 발표했다.

『동광』이 발표한 ‘조선운동가 10인’의 첫 손에 꼽힌 이가 바로 야구의 천재로 불렸던 이영민이었다. 이영민은 14명의 선정위원 모두로부터 표를 얻어 마라톤의 김은배(13표)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동광』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영민과 김은배의 뒤를 이어 김복림(여자정구. 11표), 황을수(권투. 10표), 유약한(육상 투원반. 9표), 현금녀(여자육상 단거리. 9표), 함용화(야구. 6표), 노승현(육상 투창), 김원겸(축구. 이상 5표), 최재은(빙상. 4표), 장원진(정구. 3표), 김윤근(씨름), 이혜택(농구), 윤명선, 엄동원(이상 럭비), 김명수(육상), 강락원(유도. 이상 2표)이 이름을 올렸다.

이영민은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같은 신문은 물론 『동광』이나 『조광(朝光)』 같은 잡지 등에도 단골손님처럼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 운동선수로서 이영민만큼 매스컴을 많이 탄 이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는 이영민이 야구는 물론 육상과 축구대표 선수로도 활동한 이력과도 무관치 않다. ‘만능’과 ‘최고’ 선수라는 인상이 깊었던 그는 그야말로 ‘인기’를 끌었던 스타였기 때문이다. 경성운동장(옛 동대문구장) 개장(1926년) 이후 동양인 1호 홈런(1928년 6월 8일)을 기록했던 이영민은 1934년 11월엔 조선선수로는 유일하게 일본야구올스타로 뽑혀 미국 메이저리그 선발팀과 경기를 한 이력도 있다.

1905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이영민은 대구계성학교, 배재고보와 연희전문을 거쳐 1936년 식산은행 야구선수를 끝으로 31살의 나이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의 선수생활을 돌이켜보는 수기(手記)가 실린 것은 『조광』 1937년 5월호(제3권 5호)였다.

‘은퇴하는 명투수-야구생활 15년기(記)’라는 제목을 단 이영민의 은퇴수기(이하 표기와 맞춤법을 현대어로 바꿈)는 7쪽에 걸쳐 ‘출발-무대는 연전으로-홈런왕-식산은행의 야구선수로-일본에 원정-반생에 잊을 수 없는 경기-일․ 미 대항전에 출전-은퇴의 이유’ 순서로 자신의 선수 생애를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인 어조로 되돌아보고 있다.

이영민은 1929년 봄에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식산은행에 들어갔다. 당시 식산은행은 30명의 야구선수들 가운데 조선인으로는 이영민이 유일했다. 일본 6대학리그 출신들이 많아 실력이 쟁쟁했지만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1932년 일본 게이오대학 팀이 원정을 왔을 때 팀은 졌지만 당시 일본의 유명투수였던 미야다케(武宮)에게서 홈런을 빼앗고 ‘조선의 홈런왕’, ‘천재야구인’ 소리를 듣게 됐다.

이영민은 1954년 8월 12일 새벽 3시 45분께 서울 종로구 필운동(사직동 근처) 자택에서 셋째 아들(이인섭, 당시 19세)의 친구 조용호와 이재식(이상 당시 18세)이 침입, 절도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피습돼 총탄에 쓰러져 생애를 마감했다.

대한야구협회는 1958년 이영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영민 타격상’을 만들어 해마다 가장 타격 성적이 뛰어난 고교야구 선수에게 상을 주고 있다. 그 상은 이영민을 기억하게 하는 끈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렇다면 이영민이 공식적으로 날린 홈런은 몇 개나 될까. 그 답은 9개다.

그가 밝힌 선수생활 15년 동안 출전한 경기 수는 520여 게임이다.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고작 9개냐’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절에는 홈런을 날렸다는 자체가 사실 대단한 일이었다.

이영민의 ‘홈런 이야기’는 조선식산은행 시절인 1936년 『월간중앙』 1월호에 기자와의 인터뷰 형식으로 실렸다.

“지금까지 홈런을 친 것이 몇 개나 됩니까?”

“얼른 생각이 안 납니다만 전부 아홉 개 가량 되나 봅니다.”

‘홈으런 갈긴 이야기’라는 제목 아래 4쪽에 걸쳐 자신의 선수생활을 돌아본 이영민은 1년 뒤인 1937년 3월1일(『조광』 1937년 5월호, ‘은퇴하는 명투수, 야구생활 15년기(記)’라는 글에서 이영민이 밝힌 은퇴일)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참고로 한국야구 프로화(1982년) 이전 아마추어 신분으로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박현식(1929~2005년)으로 모두 112개로 알려져 있다. 그 숫자는 박현식이 현역 시절 홈런을 칠 때마다 일일이 자신의 기록을 정리한데 따른 것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한야구협회의 공식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없다. 박현식은 홈런을 칠 때마다 그 공을 회수, 경기날짜와 상대팀, 투수 이름을 일일이 기록해놓았다. 현재 박현식의 사인 홈런 공은 그의 사후 유족측이 KBO 아카이브센터에 기증, 56개가 보관돼 있다.


이영민의 야구선수 생활은 조선식산은행 야구부에서 절정을 이루고 그 곳에서 막을 내렸다. 이영민은 식산은행에서 성인야구선수로 전성기를 맞았으나 그 윤곽만 알려져 있을 뿐 활동 내역이 자세하게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 이영민이 식산은행에서 야구선수로 실질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1929년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입사한 때부터 1936년까지(1937년 3월 1일 공식 은퇴) 8년간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일보사와 매일신보사에서 기자생활을 했던 김을한(金乙漢. 1905~1992)은 『그리운 사람들』(1961년, 삼중당)이라는 인물회고담에서 ‘운동의 천재로서 불세출의 대선수-야구와 축구에 불멸의 공적, 송운(松雲) 이영민’에 대한 글에서 식산은행 입행 경위를 간략하게 적시해놓았다.

김을한은 이영민이 연희전문 시절 경성의전과의 대항전에서 경성운동장 개장 이래 동양인 첫 홈런을 날린 이후 강타자로 이름을 떨치게 되자 “조선 사람을 잘 쓰지 않던 식산은행에서도 그가 연희전문을 나오자 최고급으로 채용하게 이르렀다”고 돌아보았다.

최근 오영식 근대서지학회 회장의 도움으로 조선식산은행이 발행했던 『회심』에서 이영민의 족적을 찾을 수 있었다. 국회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회심』 제16권 제6호(1935년 6월호)에는 ‘영광에 빛나는 식산은행야구부(榮冠輝く殖銀野球部)’ 제하의 사진 한 장과 대회 기록인 ‘야구· 정구부보(野球, 庭球部報)’가 실려 있는데, 거기에서 이영민의 활약상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일본어로 돼 있는 『회심』은 야구와 정구부를 운영했던 조선식산은행의 사보로 식산은행행우회가 대회 소식을 정리해서 게재했다.

『회심』 1935년 6월호의 권두화보로 실려 있는 사진은 식산은행 야구부가 ‘도시대항야구대회’ 1차 예선(경성지역 리그전)에서 우승한 다음에 찍은 기념사진으로 이영민은 감독과 야구부 차장을 포함한 선수단 20명에 투수로 등장한다. 『회심』의 ‘야구부보(野球部報)’에는 경기경과(이닝별 득점 상황), 스코어보드, 선수별 포지션, 장타표시 등 1960~80년대의 국내 언론의 야구기사 보도형태와 엇비슷한 내용으로 대회의 결과를 전하고 있다. 그에 따라 이영민의 선수활동 족적도 일정 부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이영민의 식산은행 시절 활동의 편린에 그치기는 하지만 은퇴 1년 전에도 이영민이 여전히 식산은행의 주축투수로 뛰었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뜻깊다.

『회심』 1935년 6월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이영민이 투수와 외야수(주로 중견수)로 주전이었고, 간간이 2루타를 날려 장타력을 뽐냈으며 3, 5, 6, 7번 등 여러 타순에서 타격을 했다는 점 등이다. 그 잡지는 식산은행이 경성리그전에서 1934년 우승팀인 철도(鐵道)팀과 부청(府廳)팀의 맞대결 결과를 전하고 있다. 식산은행과 철도의 경기는 5월 4일과 5일, 부청과의 경기는 5월 18일과 19일에 걸쳐 열렸는데, 이영민은 가장 중요한 철도와의 리그 1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 1실점 완투승(3피안타, 3볼넷. 식산은행이 6-1로 이김)을 거두었다. 그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그의 식산은행 야구부 안에서의 위상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영민은 두 팀과의 경성리그전에 모두 투수나 중견수로 출장했으나 홈런을 기록한 것은 없다.

이영민 관련 다른 자료는 『평화일보』에 실린 글이다. 『평화일보』는 1954년 6월 21일치에 이영민이 쓴 ‘야구원정전기(野球遠征前記)’를 4단기사로 처리해놓았다. 그 글은 이영민이 한국야구사를 회고하면서 1909년 황성기독청년단의 일본원정, 1923년 휘문중학의 전일본중등야구선수권대회(甲子園대회) 출전, YMCA 포수 출신인 허성(許城)이 주동이 돼 한국야구단을 편성, 하와이에 원정을 간 것 등 이른바 해외진출 사례를 듦과 아울러 1922년 미국직업야구선발팀의 한국 첫 방문경기와 1926년 미국여자직업야구단의 방한, 도쿄유학생 방문경기 등을 기술해 놓은 것이다.

이채로운 것은 이영민이 한국야구단의 대만원정 예정을 자세하게 풀어놓은 점이다. 1954년5월 17일에는 한국과 일본, 필리핀, 대만 등 네 나라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아시아야구연맹을 결성,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그해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열었다. 이영민은 아시아연맹 결성 당시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신분으로 이홍직 회장과 함께 참석했다.

이영민의 글은 ‘대만원정야구단단장’ 신분으로 쓴 것이다. 대한야구협회는 6월 10일 대만원정 한국야구단대표선수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영민이 단장으로 돼 있다. 선수단의 대만 현지 출발은 7월 5일로 알려져 있으나 어찌된 셈인지 『한국야구사』 (1999년, 대한야구협회, 한국야구위원회 공편)에는 그 사실이 누락돼 있다.

그야 어찌 됐든 이영민의 그 글은 그의 생전 마지막 목소리가 되고 말았다. 대만 원정을 다녀온 지 한 달 만에 아들 친구의 흉탄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창가를 잘 했고요, 자전거도 잘 탔지요.”(『소년중앙』 1935년 창간호)라고 스스로 자랑했던 이영민은 그야말로 ‘만능 체육인’이었다. 축구와 육상 조선대표선수로 활동도 했고, 야구선수로는 핵심 포지션인 투수와 포수는 물론 유격수, 2루수, 3루수, 외야수(중견수, 좌익수)를 두루 맡아볼 정도로 탁월했다. 체육행정에도 깊숙이 관여했던 그는 조선축구협회 이사와 해방 이후 조선야구협회 재건과 더불어 이사장, 부회장, 이사를 역임하는 등 그의 손길이 다방면으로 뻗쳤다.

글. 홍윤표 OSEN 선임기자

사진 위=이영민(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조선식산은행 투수로 맹활약했던 1935년 5월, 도시대항야구대회 예선(경성리그전)에서 우승한 뒤에 찍은 기념사진. 『회심』 1935년 6월호에 실려 있다. (국회도서관 자료에서 따옴)

사진 아래=『평화일보』(1954년 6월 21일) 이영민 기고 글 부분(제공=오영식 근대서지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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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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