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사 재발견](3)야구(野球)가 아니라 타구(打球), 척구(擲球), 야구(野毬)였다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8.11.30 10: 06

한반도에 야구를 처음으로 전파한 이는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1872~1938)였지만 여러 자료를 살펴보면 본격적인 보급과 확산에는 재일 한국유학생들과 일본인들이 기여한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린 ‘야구(野球)’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의 ‘조어(造語)’인 것이다.
‘野球(や-きゅう)’라는 명칭은 메이지(明治) 27년(1894년) 일본 제국(帝國)대학 재학생이었던 쥬만 카나에(中馬庚. 1870~1932)가 ‘Ball in the field’를 번역해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던 쥬만 카나에는 제일고등학교(第一高等學校) 출신으로 그 학교 『교우회잡지(校友會雜誌)』에 야구부사(野球部史)를 편찬할 당시 ‘野球’라는 번역어를 창안했다. 그 것이 활자화된 최초의 ‘野球’ 기록으로 전해진다. 그는 1897년에 『野球』 이름으로 책도 펴냈다.
일본의 ‘baseball’ 용어 최초 번역은 메이지 4년(1871년)에 발간된 『화역영사림(和譯英辭林)』에 나온 ‘たまあそび(玉遊ビ, 공놀이)’였다. 적당한 번역어를 찾기에 고심한 나머지 메이지 18년(1885년)에 시마무라(下村泰大)라는 사람은 『서양호외유희법(西洋戶外遊戱法)』이라는 책에서 ‘打球 鬼ごっこ(공치기 술래 잡이)’로 바꾼 적도 있다. 하지만 마뜩치 않았는지 그 후 ‘베이스볼’로 되돌아갔다.

그야 어쨌든, 한국도 처음에는 ‘베이스볼(뻬쓰-뽈 등으로 표기)’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일본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野球’를 받아들여 점차 뿌리를 내린 것으로 보인다.
야구도입 초창기에 『황성신문』 이나 『대한매일신보』에는 ‘baseball’의 특징을 잘 나타낸 ‘칠 타(打)’자를 앞세운 ‘打球(타구)’나 ‘野毬(야구)’, ‘던질 척(擲)’자를 네세운 ‘擲球(척구)’, ‘칠 격(擊)’자가 앞에 나온 ‘격구(擊球)’ 등을 만들어 썼다. 그렇지만 ‘野球’라는 명칭도 1909년 이후에는 등장한다.
야구(野球) 용어의 유래는
打球(타구); 한국 최초의 야구기사는 『황성신문』 1906년 2월 17일치 2면 ‘雜報(잡보)’란에 ‘打球盛會(타구성회)’라는 네 글자 제목 아래 실린 ‘皇城基督靑年會會員과 德語學校學徒가 馬東山에서 一大打球會를 設行하였는데 德語學徒가 三次를 勝하고 又同土曜日에도 二次를 勝하였다더라’는 5줄짜리였다.(한국야구사 재발견2-11월 23일 OSEN)
이 기사에는 야구를 ‘打球’로 표기했다. 
‘打球’는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대한매일신보』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훈원타구(訓院打球)’(1909년 7월 23일), ‘안군타구(安郡打球)’(1909년 8월 3일), ‘타구득승(打球得勝)’(1910년 5월 18일) 등의 제목 아래 일본유학생들이 귀국해 경성(서울)과 평양, 안악 등지에서 열었던 야구대회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다. 그 가운데 ‘훈원타구(訓院打球)’기사에는 특히 ‘뻬이스뽈打球會’(뻬와 뽈의 실제 표기는 ‘ㅅㅂ’의 복자음을 사용하고 있다)라는 표기도 등장한다.
‘野毬(야구)’; 여러 표기 가운데 ‘野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球’ 아닌 ‘毬’자를 써서 ‘野毬’로 표기한 사례는 1909년과 1910년 사이의 『황성신문』에 자주 보인다. 같은 ‘공 구’자이지만 ‘毬’쪽이 실로 만든 공의 뜻을 명확히 전달하고 있어 타당성이 있다.
『황성신문』 1909년 7월 22일치 ‘야구단운동가(野毬團運動歌)’와, 같은 해 1909년 7월 24일치 ‘위설오찬(爲設午餐)’, 7월 25일치 ‘야구단운동성황(野毬運動盛況)’ 의 기사에서는 ‘야구(野毬)’라는 명칭이 잇달아 나타난다. 1910년 2월 27일치 ‘고교득승(高校得勝)’ 기사에도 ‘야구경기(野毬競技)’로, 같은 해 5월 12일치와 7월 27일치에는 ‘야구경쟁(野毬競爭)’ 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擲球(척구)’; 『대한매일신보』 1909년 10월 23일치에는 ‘척’을 한글제목으로 표기한 ‘척球後報’아래 청년회관(현 YMCA를 지칭) 선수들이 야구경기를 한 내용이 실려 있다. 또 같은 신문 1910년 2월 20일치에는 ‘擲球競爭會(척구경쟁회)’ 제목 아래 ‘한성고등학교(현 경기고 전신)와 관립외국어학교 덕어(德語+독일어)부 , 청년학관 회원들이 ’야구경쟁회(野毬競爭會)를 연다‘는 기사를 실었다.
‘격구(擊球)’;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29일치에 ‘擊球會準備(격구회준비)’라는 기사가 들어 있다. 같은 신문 같은 날짜 한글판에는 ‘격구경쟁회’라는 기사도 보인다.
‘야구(野球)’ 명칭과 관련,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1975년 대한야구협회 대의원총회에서 조선야구협회 발기위원(1946년)이었던 야구원로 손희준(孫禧俊.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던 손병희의 손자)이 ‘야구란 이름이 일본의 명칭이니 원명인 베이스볼로 고치든지 마땅한 우리말로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그대로 쓰자는 의견이 많아 무산된 일화가 있다.
『경향신문』 1976년 1월 26일치에 ‘野球(야구)는 日本(일본)명칭, 改名案 不發(개명안 불발)’ 이라는 제목으로 손희준의 야구 명칭 변경 제안을 다루었다. 그 기사는 ‘孫禧俊 씨는 야구의 경우 많은 용어가 영어로 그대로 쓰이고 있는데 굳이 일본말인 야구로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면서 중국에서는 봉구(棒球)로 쓰인다고 설명했다. 많은 대의원들은 孫 씨의 뜻은 좋으나 마땅한 이름이 없으니 그대로 쓰자고 우겨 끝내 孫 씨의 뜻은 관철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베이스볼’의 번역은 ‘봉구(棒球)’라고 부르는 중국이 창의적이다. ‘코카콜라’를 ‘可口可樂’으로 바꾼 사례에서 보듯 중국의 외국어, 특히 스포츠 종목의 이름 바꾸기는 기발한 데가 있다.
이미 뿌리를 깊게 내린 ‘야구’를 이제 와서 다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그냥 ‘야구를 야구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할지라도 우리네 체육마당에 널리 퍼져 있는 ‘시합(試合)’ 따위의 일본어는 ‘경기’ 등으로 대체해야 마땅하다.
글/홍윤표 OSEN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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