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인터뷰] 정재국, 한뼘피리로 60년..불멸의 열정을 만나다

[거장 인터뷰] 정재국, 한뼘피리로...
국악사양성소에서 그는 정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 무용, 판소리 등 거의 모든 전통예술 장르를 섭렵했다. 하지만 1순위는...

[OSEN=최나영 기자] 지금의 정악(正樂)을 거론하는 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46호 피리 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인 정재국 명인이다. 현재 정악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재국 명인을 OSEN이 만났다. 70대에 신보 발표를 한 그에게서는 정악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 그리고 지치지 않는 열정의 숭고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 궁중음악과 정악의 전통을 지켜온 정재국 명인이 이번에 발표한 음반은 그간 일궈온 60년의 피리 인생의 결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당초 (앨범을)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주위의 권유가 있었다. 70세가 넘어서 앨범을 낸다는 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마지막 음반을 내보자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느냐"란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나즈막히 웃어보였다. 그가 또 한번 도전하고 결과물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동안 축적해 놓은 체력과 식지 않는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취악기는 연습을 안하고 불면 뻑뻑하기에 항상 연마를 해야 한다. 그 역시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피리 연습과 더불어 매일 헬스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 현재 폐활량이 40대라는 그는 "병원에서 한쪽 폐가 더 크다고 하더라"고 말하며 다시금 웃어보였다. 보통 피리 연주자는 50세가 되면 수명이 다 한다고 하는데 이는 그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다.

이번 다섯 번째 앨범의 타이틀은 '한뼘피리로 60년 한길‥수탉처럼 울다'. 명징한 피리소리를 아침에 우는 수탉 소리에 비유했다. 작지만 강한 힘을 지닌 악기인 피리의 매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음반이다. 수록곡들은 피리 연주자로서는 히말라야 정복처럼 버거운 곡목들이자 정악곡들 중에서는 가장 중요한 곡들이다. 관악곡의 백미편인 '평조회상', 선비음악의 대명사 '가즌회상', 그리고 역시 선비음악인 가곡에서 기원한 '경풍년', 피리 독주곡으로 대표적인 '상령산 풀이' 등으로 구성돼 있다.

지금까지 그는 어떤 인생을 걸어왔을까. 1942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한 그는 조실부모하고 형편이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모든 학비 일체 지원에 매달 생활비도 준다는 공고문을 보고 지원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재 국악고의 전신)에 지원, 덜컥 합격해 2기생으로 들어갔다. 국악이 뭔지도 모르고 시작한 정악 인생. 한 마디로 운명이었다.


국악사양성소에서 그는 정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 무용, 판소리 등 거의 모든 전통예술 장르를 섭렵했다. 하지만 1순위는 정악이었다. 가까운 민속악과 비교해보자면 정악은 그보다 훨씬 재미가 덜한 지루한 음악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정악을 이어가기 위해 뽑힌 학생이었고 의무에 충실했다. 그리고 그는 평생을 함께 할 피리의 매력에 빠졌다.

국악사양성소를 졸업하고 간 군대에서도 피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군악병으로 배속된 그는 당시 개그맨 이주일, 대금주자 이생강(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과 만나게 됐다. 그는 이생강 선생과 듀엣으로 흘러간 노래들, 팝송과 가요 등 다양한 곡들을 연주했다. 이주일이 그를 두고 '피리의 왕자'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제대 후 1966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간 그는 단숨에 정악단의 중심이 됐다. 그의 스승이기도 한 김준현 명인이 40대 중반에 타계하는 바람에 20대의 풋풋한 나이에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40~50대 선배들과 함께 무대에 서야만 했다. 피리가 정악을 맨 앞에서 이끄는 만큼, 그는 악단의 리더인 ‘목피리’ 자리도 맡았다. 이른 나이에 출세했지만 그 만큼 어깨가 무거웠던 것은 당연하다.

1972년 한국 최초 피리독주회 '정재국류 피리산조'를 개최하고 1993년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피리정악과 대취타라는 다른 분야를 아우르는, 중요무형문화재 제 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1998~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한 10년을 제외하고 국립국악원을 이끌었으며 2008년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등을 거쳤다. 2008년 보관문화훈장과 2011년 제18회 방일영국악상을 받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이자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도 역임했다.

이처럼 화려한 경력에 피리에 있어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고 국악계에서 제일 큰 상을 여러번 받은 정악계의 큰 어른. "스스로 자신이 이뤄온 성과를 돌아보시면 굉장히 큰 보람이 있을 것 같다"란 말에 그는 자부심이 크다고 말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전통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었다.

정악에서의 피리는 당초 합주 악기지 독주 악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악에서 피리를 독주 악기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1972년에 최초 피리 독주회를 연 것은 일종의 파격으로서 피리가 독주를 할 수 있는 악기임을 온 세상에 보여준 것이다. 그는 "순수 독주를 하면 혼자서 박자를 넘나들며 연주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율성을 가질 수 있다. 음악적 특성을 살린다는 장점이 있는 것이다. 자율성을 얻은 피리 음악의 아름다움은 더욱 커진다"라고 전했다. "수십년간 섰던 무대가 손꼽을 수도 없이 많을 텐데 그럼에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연주가 있다면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도 이 피리독주회였다.

그의 인생을 관통한 피리. 이 작은 악기가 특별히 그의 마음에 와 닿은 이유, 피리만의 매력에 대해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려줬다.

"피리는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아주 잘 드러나는 악기에요. 감정 표현이 제일 잘 되는 게 피리에요. 또 소리가 굉장히 화통하고 음 강약의 조절이 대단하죠. 우리나라 악기의 단점이 강약이 안 되는 거거든요. 피리는 마이크가 없어도 돼요. 소리가 워낙 크고 표현력이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 음악의 특징인 농연도 제일 잘 돼요. 한 구멍에서 3음절의 소리가 나죠. 무엇보다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악기지. 연주자의 흔들리는 마음, 긴장되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요. 연주자의 가슴이 떨리면 피리 소리는 거짓말을 못해요. 제 소리가 안 나죠. 그래서 무대 위에는 '내가 최고다' 이런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기 죽어서는 안 된다는 소리에요. 그리고 옛날 악기 같지만 음악적 쓰임새는 최고에요. 대중성이 있고 양악과도 가장 잘 어울려요."

그는 정악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정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는 한예종 교수 재직 당시 피리를 개량해 다양화하기도 했다. 옥타브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피리의 음역대를 넓히고 향피리, 대피리를 개량한 것. 전통의 맥을 지키고 계승하면서 새로움을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터. 그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다.

"아무리 정악이라도 그대로 있으면 안 돼요. 선생님들이 냉장고에 다 넣은 것들을 우리가 다 먹어서 텅텅 비었어요. 그러면 우리가 음식을 만들어야 해요. 정악을 새롭게 한다는 것이 어찌보면 말이 안되는데, 악기 편성 등에서 변화를 줬어요. 연주자들이 연주하면서 느끼는 부족한 것들 역시 극복하고자 했어요."

40대 초부터 피리의 1인자로 불린 그는 "선생님들이 일찍 돌아가시거나 피리를 놓으셔서 공부를 많이 못한게 아쉽다"라며 자신이 후진 양성에 남달리 힘쓰는 이유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받은 상금들은 모두 기부하며 국악계에 실질적인 보탬이 되고자 한 그에게는 실제로 많은 제자들이 있다. 대략 200명 정도. 한국 땅에서 피리 좀 분다고 하는 연주자들은 거의 그의 제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자들은 정재국 명인을 명쾌하고 함축적으로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라고 한다.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있어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음악은 자기 마음과 똑같다. 특히 정악은 너무 화려하거나 표현력이 과하면 안 되고 중용이 가장 중요하다. 중간의 음악을 해야 한다. 민속악과 다르게 정악은 점잖고 화평한 음악이다. 그러면 연주하는 사람의 성격도 그렇게 변하게 돼 있다. 진중해지고 무게가 생기고. '바른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된다"라고 전했다.

"정악은 들으면 들을 수록 좋아요. 과거에는 평민이 듣지 못하는, 궁 안에서만 하는 의식 음악이 발전한 거라 느리고 무게가 있어 지루할 수 있지만 들을수록 여운이 남는 음악이에요. 1300년 전 백제 시대의 곡 '수제천'을 외국에서는 최고의 명곡으로 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정악은 과거 뿐 아니라 미래가 있다. 그는 "80년대만해도 (공연에서)연주하는 사람이 더 많았는데 지금은 공연장에 관객이 꽉 찬다. 살아있는 음악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정악의 흐름에 내가 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뿌듯하다.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음악은 의미가 없는데 정악은 그렇지 않다"라며 정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다시한 번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정재국 명인은 "살아있는 동안 건강하게 살아 온 것에 감사하고, 피리로 공무원처럼 일생 일하며 제자를 다 기른 것도 감사하다"라며 피리와 그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 정재국 명인 프로필

- 주요경력

1966 ~ 1995 국립국악원 국악사연주원, 악장

1996 ~ 1998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1998 ~ 2007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

2006.03 ~ 2007 제3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원장

2008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2011.03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2014.05 ~ 2016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현재)인간문화재(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

정농악회 회장

사단법인 대악회 이사

한국음악사학회 이사

- 수상경력

2011 제18회 방일영국악상

2008 보관문화훈장

1989 문화포장

1971 이달의 음악가상

1983 국악대상

2005 송산문화상. / nyc@osen.co.kr

[사진] 정재국 명인, 앨범 스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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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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